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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3) 통일애국의 길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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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명철 작성일1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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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3)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

□ 통일애국의 길을 찾아

 

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숨쉬고 존엄과 위용을 만방에 떨쳐가고있는 공화국은 각이한 운명의 길을 걸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참된 삶을 누릴수 있게 하여주는 진정한 어머니품이다.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6. 15북남공동선언의 채택으로 온 겨레의 통일열망이 삼천리강토에 뜨겁게 차넘치던 2000년 6월 15일 밤, 만수대언덕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동상을 오래도록 우러르는 나이지숙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윤성식선생이였다.

 

윤성식(1937. 5. 14-2008. 8. 14)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1950년대 남조선에서 진보당 당원으로 활동. 1960년 4월인민봉기에 참가. 1960년대초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상무위원 겸 통일방안심의위원으로 활동. 주체87(1998)년말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 사회정치학박사, 조국통일상수상자.

 

반세기를 넘기며 이 땅에 칭칭 감긴 분렬과 대결의 사슬을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명제로 순간에 끊어버리시고 자주통일의 길, 애국애족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

공동선언에 서명하시는 그이의 숭엄한 모습은 조국통일을 필생의 위업으로 간주하시고 위대한 심장의 고동이 다할 때까지도 통일을 위해 애쓰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모습 그대로이시였다.

만수대언덕에 서있는 윤성식선생의 가슴속에서는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칭송의 정이 용암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밑에 오래전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령수로 흠모하면서 그이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강국으로 위용떨치는 공화국을 깊이 동경해왔다.

그의 아버지 윤윤기선생으로 말하면 일찌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을 만나뵙고 조선국민회의 한 성원이 되여 반일애국활동무대에 나섰던 사람이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조선독립을 이룩하실 원대한 뜻을 품으시고 주체6(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신 뒤 불타는 열정으로 력사의 새벽길을 헤치시며 조직을 확대강화해나가시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에 조선국민회 지부들을 내오신 후 전라도땅에 오시여 조선국민회 목포지부를 결성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그해 8월 보성땅을 찾아주시고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이 일대의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적인민들을 규합하시여 조선국민회 보성지부를 결성하시였다. 이 뜻깊은 자리에는 당시 17살의 애국청년이였던 윤윤기선생도 있었다.

후대교육사업은 민족해방과 무산혁명의 후비력량을 마련하는 성스러운 애국사업이라고 하시며 피끓는 청년의 가슴에 애국의 표대를 세워주시고 남아대장부답게 큰걸음을 떼라고 힘과 용기를 부어주신 김형직선생님을 윤윤기선생은 위대한 스승으로, 참다운 지도자로 모셨다.

김형직선생님을 따라 반일애국의 길에 들어선 윤윤기선생은 그후 려운형선생으로부터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광복회를 창립하시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모든 조선동포들이 일심동체가 되여 반일해방전선에 총동원될데 대한 그이의 민족대단결사상에 호응하여 조국광복회조직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주체29(1940)년 겨울에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올 결심을 안고 길을 떠나 간난신고끝에 조선인민혁명군의 어느 한 부대에까지 찾아가기도 하였었다.

주체33(1944)년 여름 위대한 수령님의 전민항쟁로선을 받들고 서울에서 반일지하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한 려운형선생의 위임을 받고 또다시 그이를 만나뵙기 위하여 길을 떠났으나 이때에도 행운을 받아안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때를 회상하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려운형의 련락원이 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우리가 그 당시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활동하였기때문이였습니다.》

절세의 위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이토록 절절하였기에 그는 해방후 복잡한 남조선정세를 바로잡아주실분은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는 신념밑에 《건국준비위원회》의 한 성원으로서 그이의 서울입성을 목마르게 기다리기도 하였다. 또한 미제와 그 주구들이 《단선단정》을 부르짖으며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미쳐돌아갈 때에는 려운형, 김규식, 조봉암, 홍명희, 백남운선생들과 함께 《13인 시국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투쟁하다가 그 길에서 희생되였다.

바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이 있어 윤성식선생은 아버지가 걸었던 통일애국의 길을 굳건히 이어갈 결심을 안고 40여년간 반독재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투쟁대오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조선에서 1955년 12월 반제, 반파쑈, 평화통일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투쟁강령을 내놓은 진보당이 출현하였을 때 그는 학생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 4월인민봉기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1960년 11월 사회대중당이 결성되였을 때에는 이 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광범한 민주력량의 통일전선련합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서 상무위원 겸 통일방안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을 활발히 벌렸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주체49(1960)년 4월인민봉기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시면서 이렇게 언급하시였다.

《사회대중당의 지도밑에 투쟁의 불길은 남조선 온 지역에 세차게 타번지고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은 <통일만이 살길이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들고 남북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영웅적인 투쟁을 벌렸습니다.》

윤성식선생은 이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대학생시절부터 몸담았던 진보당과 사회대중당의 활동 그리고 자기들이 내들었던 통일애국의 구호까지 높이 평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윤성식선생은 그때부터 더욱 맹활약하여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로 대중을 불러일으키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을 벌리는데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도서 《변혁과 통일》, 《통일로 가는 길》을 집필하고 《한겨레》 등 출판물들에 많은 글들을 발표하여 남조선인민들의 자주화와 민주화, 조국통일투쟁에 힘을 주었다.

남조선에서 통일운동에 심혼을 쏟을수록 그의 마음은 조국통일사상과 령도의 본거지인 북으로 더더욱 쏠리였다. 특히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도 령도자와 인민이 하나로 굳게 뭉쳐 제국주의자들의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을 단호히 짓뭉개버릴뿐아니라 인공지구위성 《광명성1호》까지 쏴올리며 강성대국을 향해 신심드높이 전진해나가는 공화국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통일된 민족의 장래는 북에 있다는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민족의 미래는 북에 있다. 그곳에서 통일애국의 길에 나의 여생을 다 바치자.)

이렇게 되여 윤성식선생은 1998년말 동경하여마지 않던 공화국에 삶의 닻을 내리게 되였다.

그는 국내외기자들앞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공화국으로 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김일성장군님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령수로 마음속깊이 모시고 살았다. 해방후 북에서 실시한 제반 민주개혁과 국민적인 시책들은 나로 하여금 김일성장군님의 정치야말로 민중을 위한 참정치이며 장군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헛된것이 아님을 확신케 했다.

더우기 오늘 김일성주석님의 유지를 그대로 이어 이북을 근로민중을 위한 참세상으로, 강성대국으로 꾸려나가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과 흠모는 나의 월북을 촉진케 한 근본요인이였다.

나는 전도가 유망한 북에서, 자애로운 김정일장군님의 슬하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보내고싶었다. 북에 와서 <보안법>때문에 마음껏 쓸수 없었던 통일과 민주에 관한 글을 써서 민족앞에 미력이나마 바치고저 월북을 단행하게 되였다.》

공화국에서는 이곳에 일점혈육도 없는 그를 육친의 정으로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가 평양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도록 해주었고 높은 국가수훈도 안겨주었다. 그리고 조국통일성업에서 한몫하도록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내세워주었으며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친어머니심정으로 보살펴주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생일 70돐을 맞는 윤성식선생에게 사랑의 생일상까지 보내주시였으며 세월의 이끼속에 묻혀버린 윤성식선생의 아버지의 공적을 찾아내도록 하시고 반일애국렬사증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윤성식선생은 그사이 도서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여》, 《절세의 위인과 민족의 존엄》 등을 집필하였고 여러편의 글을 출판물에 발표하였다. 그러한 과정에 그는 사회정치학박사의 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공화국에서는 그의 조국통일투쟁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사후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새 인간으로 다시 태여나 행복한 삶을 누려가고있는 사람들속에는 《동진 27》호 선원들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어느날 공화국령해인 장산곶 서북방 20여n·mile지점에 침입하였다가 조선인민군 해군에 의하여 단속된 한척의 남조선어선이 있었다. 이 배가 《동진 27》호였다.

조사과정에 이 배의 선장과 어로장이 《안전기획부》(당시)로부터 간첩임무를 받고 들어와 북측령해에서 정탐행위를 하였다는것이 밝혀졌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자백서를 통하여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때문에 이 배는 물론 그 선원들도 마땅히 공화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되여야 하였다.

그러나 공화국정부는 자기들의 배가 간첩선이라는것을 모르고 배에 올랐던 선원들이 공화국에 영주할것을 요청해나서는 조건에서 동포애의 정으로부터 그들이 희망대로 공화국에서 보람찬 새 삶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공화국의 품에 안긴 선원들가운데는 《동진 27》호 갑판장이였던 강희근선생도 있다.

1951년 9월 경기도 강화군에서 다섯남매의 둘째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별의별 고생을 다 겪으며 자랐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돈이 없어 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는 뼈도 채 굳지 못한채 남의 집 머슴도 살아보았고 기와공장에서 기와찍는 일도 해보았으며 농사도 지어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사자밥을 지고 바다에 뛰여든 후 생존을 위해 풍랑사나운 파도에 운명을 맡긴 아들의 정상이 너무도 가슴아파 어느날에는 《사주팔자》까지 보았건만 그것이 타고난 숙명이라는 이야기에 울고말았다고 한다.

이런 그였기에 자기들의 배가 단속되였을 때 수치스럽게도 민족배반의 길을 걷도록 한 남조선으로 다시는 돌아가고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들과 같은 평범한 로동자, 농민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는 북에서 살고싶은 마음에서 스스로 이곳에 남기로 하였다.

공화국에서는 고향도 부모형제도 남쪽에 두고온 그가 북에서 외로움을 느낄세라, 불편해할세라 살뜰히 돌보아주었다.

공화국에서는 그에게 남쪽에서 쓰고살던 집보다 더 좋은 살림집을 마련해주고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살수 있도록 온갖 생활조건들도 무상으로 다 보장해주었다. 그가 일에서 자그마한 성과를 거둘 때마다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었고 국가적인 대회장에도 불러주었다. 또한 마을사람들과 공장의 책임일군들은 그가 외로워할세라 자주 찾아와 도와주고 집일을 거들어주고 생일날에나 명절날에는 함께 즐겁게 지내군 하였다.

이 나날에 그는 공화국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였고 자신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줄 아는 참된 사람으로 성장할수 있었다.

하기에 그는 제2차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성원으로 평양에 왔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을 떠나서는 못삽니다. 그이의 품에 안겼기에 내 인생행로에는 행복의 만리길이 펼쳐질수 있었으며 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어머니와도 만나고 겨레모두가 잘살수 있는 통일조국의 그날이 있습니다.》

강희근선생만이 아니다. 같은 배의 선원이였던 정일남선생도 삶의 보람을 안겨준 공화국의 품에 안겼기에 지난날 불우한 사나이로부터 복받은 행운아로 될수 있었다.

그 역시 공화국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불우한 인생이였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부모들을 따라 리발가위와 미장칼을 들고 치렬한 생존경쟁의 마당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남조선사회는 그와 같은 밑바닥인생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랭정하였다.

사회의 버림받은 인생이였던 그에게 있어서 리발가위는 유일한 동무이자 무권리의 징표였다.

언제면 나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는가 하던 그의 꿈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이루어질수 있었다.

공화국에서는 남조선에서 제 집이라는 말도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훌륭한 주택을 마련해주었으며 30살이 넘도록 가정을 이루지 못한채 생존경쟁의 마당에서 헤매이던 그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고 새 삶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여주었다.

하기에 2005년 11월 금강산에서 진행된 제12차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때 행복에 넘쳐있는 아들만이 아니라 며느리, 손자손녀들까지 만나본 그의 어머니는 감동에 넘쳐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에 아들의 건강한 모습과 행복한 가정을 보고 정말 눈물이 나도록 기뻤습니다. 가난한 우리 집안에서 일남이를 끼고 키웠다면 그가 이처럼 행복한 사람이 절대로 될수 없습니다. 이제야 우리 집안의 기둥이 바로 서게 되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것을 어찌 그 한사람만의 진정이라고 하겠는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사회주의조국이야말로 휘뿌려진 한알의 씨앗도 새싹으로 움터 알알이 영근 열매를 맺게 하는 어머니대지이라는 남녘의 열화같은 감사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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