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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3)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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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명철 작성일1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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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3)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

□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2000년 9월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손에 총을 잡고 통일성전의 길에 나섰다가 수십년세월 남조선의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원쑤들과 싸워온 통일애국투사들을 비롯하여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판문점분리선을 넘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7년전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선생이 넘어섰던 발자욱을 따라 수십여명의 대집단이 꿈결에도 그리던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길수 있은것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이 있었기때문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생존여부가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초부터 그들모두를 데려올 결심을 굳히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미대결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주체83(1994)년 2월말 일군들에게 세계에 옥중투쟁을 하여 소문이 난 사람들이 있지만 남조선의 감옥에서 30년 또는 40년을 굴하지 않고 옥중투쟁으로 인생의 전부를 보낸 비전향장기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어떻게 하나 모두 데려올 결심을 하고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선군령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속에서도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들을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건강과 귀환을 위해 수십여차례의 말씀을 주시면서 적극적인 조치들을 다 취해주시였다.

주체86(1997)년 5월 남조선에 있는 한 비전향장기수가 34년간의 옥중투쟁과정에 얻은 병세의 악화로 고생하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그의 건강회복에 필요한 고급약재들을 보내주도록 하시였으며 그 약들이 어떻게 하나 본인에게 가닿도록 제반 조치들을 다 취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북에 처자가 있건 없건, 고향이 북이건 남이건 관계없이 공화국의 품에 안기기를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들은 다 데려오도록 뜨거운 은정도 베풀어주시면서 그들의 귀환투쟁이 세계적범위에서 힘있게 벌어지도록 하시였다.

공화국의 여러 사회단체들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조속한 귀환을 요구하여 성명과 담화를 련속 발표하였으며 국제인권단체들과 기구들, 세계각국의 인권기구들과 정당, 단체들에 편지들을 보내였다. 한편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속에서도 편지보내기, 서명운동, 기자회견, 항의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귀환운동이 벌어졌으며 여기에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국제사회계와 세계각국의 진보적인 정당, 단체들도 광범히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문제는 세계적으로 20세기 최대의 인권문제, 인도주의문제로 부각되게 되였다.

평양상봉의 나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북과 남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수없이 많았건만 그들의 귀환문제를 특별히 제기하시고 6. 15북남공동선언의 중요한 조항의 하나로 명문화하도록 하시여 그들의 귀환이 기정사실로 되도록 하시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에로의 귀환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시였다.

조국해방전쟁승리 47돐을 맞는 주체89(2000)년 7월 27일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게 된다는데 대하여 알려주시면서 《그들은 수십년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신념과 의지를 굽히지 않은것으로 하여 떳떳하게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습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을 다 데려오고 <고난의 행군>, 강행군도 끝내자는것이 나의 결심입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수령님과 당을 믿고 수십년동안 형언할수 없는 악형과 박해속에서도 혁명적지조를 지켜온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데려와야 한다고, 이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하시면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30∼40년동안 지조를 지킨다는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향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감옥살이고통을 면할수 있었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은 그 어떤 유혹이나 강압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크나큰 믿음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정녕 그러하였다. 그들도 인간일진대 인생의 가장 활력넘치는 시절을 바깥세상을 밟아보지 못한채 육신을 부셔놓는 육체적악형과 전향강요의 정신적박해속에 보낸다는것이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고통이며 불행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것이다. 오로지 사상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이 뚜렷하고 강한 정신력을 지녔기에 그들은 수의를 벗지 못한채 죽으면서도 전향이라는 배신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은 사상의 강자, 신념의 강자들이였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운명의 곡절은 한탄으로 가슴쥐여뜯는 불우한것이 아니였고 원쑤들과의 치렬한 싸움이였으며 스스로 선택한 애국의 길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서 옥문을 나서리라는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수의를 입은채 눈을 감는것이야말로 자기의 사상과 신념, 조국과 인민에 대한 충실성의 최선의 검증이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이렇듯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려주시는분이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숭고한 사랑이 있어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집단귀환이라는 세계적인 사변이 선군조선의 대지우에 펼쳐지게 된것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귀환길에 오른 비전향장기수들중에는 전진선생도 있다.

전라북도 옥구(당시)에서 태여나 소년시절에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그는 해방전까지만 하여도 땅에 명줄을 걸고 살아가던 평범한 농민이였다. 언제면 한뙈기나마 제땅을 가져볼가 하는 그의 소원은 해방후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바라고바라던 소원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하여 고향땅이 해방된 후에야 이루어질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된 남반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시여 제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하던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을 풀어주신것이였다.

《전진. 논 2 000평》

자기 이름이 적힌 패말을 쓸어보는 그의 두볼로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땅, 얼마나 가슴허비던것인가. 물처럼 공기처럼 그것없이는 살수 없는 귀중한것이면서도 그것을 가진자들에게는 치부와 향락이 차례지고 가지지 못한 농민들은 수난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원한의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전진선생의 생활에도 땅에 맺힌 원한이 사무치게 새겨져있었다.

언제인가 지주놈의 소작을 부치던 그는 소작지옆에 있던 자그마한 물웅뎅이를 2년세월 하루같이 흙을 날라다 메워 논으로 풀었었다. 공들인 보람으로 다음해 벼가 용을 쓰며 자라 소작지보다 더 잘되였다.

그러자 지주놈은 그 땅을 제땅이라고 하면서 빼앗으려들었다. 그놈은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항거해나서는 전진선생을 마구 때리다못해 네 땅이면 어디 한번 실컷 먹어보라고 하면서 그의 입에 흙을 마구 쑤셔넣기까지 하였다.

그의 입과 코에서 쏟아진 피는 땅을 붉게 물들였고 잔등에 썩살이 배기도록 피땀으로 얻어낸 땅은 끝내 빼앗기고말았다.

땅에 사무친 그의 이 설음, 친부모도 풀어줄수 없었던 그 원한을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풀어주시였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수 있었으랴.

그의 가슴속에는 농민들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내 땅, 고마운 이 세상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생활을 통해 깊이 새겨졌고 그것은 지울수 없는 신념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자기의 땅을 지켜, 비록 한두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였지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안겨준 공화국의 품을 지켜싸울 일념으로 서슴없이 유격투쟁에 나섰다.

고향마을을 떠나기 전에 그는 자기가 분여받았던 땅의 흙을 한줌 주머니에 넣었다. 그 흙주머니를 몸에 지니고 공화국의 은덕을 생각하며 싸울 일념에서였다.

그때부터 이 흙주머니는 수십년세월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흙주머니가 있었기에 그는 풀뿌리를 캐여먹고 생눈을 삼키면서 피의 결사전을 벌리던 유격대시절은 물론 철창속에 갇혀있을 때에도 전향을 강요하는 교형리들에게 이렇게 웨칠수 있었다.

《나는 땅을 사랑할뿐이요. 땅과 피로써 인연을 맺은 농사군이 땅을 무상으로 주신 김일성장군님을 어버이로 섬기고 따르는거야 응당한 도리가 아니겠소. 난 땅이 하라는대로만 하는 사람이야. 장군님께서 주신 땅이 지금 나에게 전향을 거부하라고 이르고있단말이요.》

흙주머니,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 주신 땅이였고 꿈결에도 안기고싶은 공화국의 품이였다. 그속에 수령님 안겨주신 그의 존엄과 희망이 있었다. 바로 거기에 수령님을 믿고 따르는 혁명적신념과 의지가 뿌리내리고 줄기차게 자라 지난날 평범한 농사군이였던 전진선생을 불굴의 투쟁에로 떠밀어주었던것이다.

흙주머니를 품고 공화국을 희망으로 우러르며 38년간의 옥살이를 꿋꿋이 이겨낸 전진선생은 그 흙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판문점분리선을 넘어 평양으로 왔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전진선생은 그 사연깊은 흙주머니를 유서깊은 혁명의 성지와 잇닿은 백두대지에 보내여 그 땅에 뿌려지게 하였다. 백두대산줄기가 뻗어내린 남녘의 자락마다에 자리잡은 넓은 땅, 자기의 고향벌이 백두삼천리벌과 영원히 숨결과 맥박을 같이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신념의 무쇠기둥을 심장깊이 세워놓았기에 황용갑선생도 꿈결에도 그리던 어머니조국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릴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북녘땅은 언제 한번 밟아본적도, 혈육이나 친지조차 한명도 없는 생소한 곳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땅과 혈육들을 뒤에 두고 평양으로 왔다.

그것은 그가 한생 백두산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기때문이다.

조선반도의 남쪽끝 경상남도 하동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여난 그의 가슴에 백두산이 희망의 등대로 자리잡기 시작한것은 어려서부터였다.

그는 야학시절 지리산기슭의 어느 한 바위에 새겨진 《지원》이라는 글자의 뜻에서 그리고 밤마다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던 《백두산전설》을 들으며 절세의 위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키웠고 백두산정신을 따르려는 마음에서 일찍부터 반일투쟁에 나섰다.

특히 그에게 백두산정신을 따르는 매혹의 세계를 더 깊이 새겨준것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단선단정》책동을 반대하여 손에 총을 잡았던 지리산빨찌산시절이였다.

남녘에서 가장 큰 산악군을 이루고있는 지리산은 남조선을 강점하고 민족의 분렬을 획책하는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중점지대인 동시에 절세의 위인에 대한 숭배의 열풍이 세차게 끓어번진 하나의 불도가니였다.

빨찌산대오안에서는 주간신문도 발행했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발전기를 돌려 공화국의 통신과 방송을 청취하면서 최고사령관명령을 접수하여 투쟁지침으로 삼았다.

또한 생활도 싸움도 모두 백두산의 항일유격대식으로 했다. 째인 규률과 질서, 승리의 신심과 락관에 넘쳐 생활하는 빨찌산대원들이 모이는 곳마다에서는 언제나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울려퍼졌고 서사시 《백두산》이 랑송되였다. 생활뿐아니라 전투전법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조하신 백두산전법으로 싸웠다.

그래서 지리산이란 말자체가 원쑤들에게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처럼 들려졌다.

지리산빨찌산시절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령도, 풍모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고 그에 완전히 매혹된 황용갑선생의 가슴속에는 절세의 위인의 그 모든것을 떠올리게 하는 백두산이 삶과 투쟁의 위대한 성지로, 둘도 없는 마음의 고향으로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

어느해인가 황용갑선생은 감옥안에서 미국기자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기자는 지리산빨찌산은 후방도 없는 조건에서 능란한 전술로 벌써 여러해를 버텨오고있다면서 도대체 식량은 어떻게 해결하고 싸움전술은 어떤것인가, 당신들은 어떤 사상을 가졌기에 산에서 그리고 이렇게 감옥에서까지도 변함없이 싸우고있는가고 물었다.

황용갑선생은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제 나라, 제땅의 주인되여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의지를 받들고 싸우는 혁명가들이다, 김일성장군님의 사상에 매혹된 우리는 일찌기 장군님을 지리산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그리고 우리 빨찌산은 승리만을 떨치는 백두산의 유격전술로 싸웠다, 우리들의 심장속에는 오직 백두산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숭배심밖에 없다, 때문에 백두산은 언제나 우리 승리의 기치로 되고있다고 신심에 넘쳐 대답하였다.

바로 이런 신념의 기둥이 있어 그는 간고한 지리산빨찌산투쟁의 나날 힘들어도 힘든줄 몰랐고 난관과 슬픔앞에서도 비관을 몰랐으며 전향을 강요하는 원쑤들과 35년간이나 꿋꿋이 맞서 싸워이길수 있었다.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공화국의 품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명단에 황용갑선생은 제일선참으로 수표를 하였다.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날, 고향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들은 황용갑선생을 붙잡고 북에는 왜 가는가고, 여생을 편히 지내다가 제 고향땅에 묻히는것이 좋지 않는가고 하면서 그의 북행길을 만류하였다.

그러는 동생들에게 황용갑선생은 나는 철부지적부터 백두산을 마음에 안고 살며 싸워온 사람이다, 내가 태여난 곳은 지리산이지만 정신적고향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을 안고 장군님을 따라야 민족이 흥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망한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평양으로 가서 백두산을 안고 죽겠다고 하며 공화국으로 들어가려는 자기의 립장을 명백히 밝히였다.

참으로 황용갑선생에게 있어서 백두산은 하나의 추상적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감정으로 뿌리내린 삶과 투쟁, 행복의 전부였다. 그것은 곧 그의 마음의 참다운 어머니고향이였다. 어린시절에나, 지리산빨찌산시기에나 그리고 철창속에서나 그는 언제나 마음속깊이에 통일애국의 곧은 길로 떠밀어주고 이끌어주는 백두산의 부름을 안고 살았던것이다.

한생을 바쳐 자기의 신념을 지켜냈고 그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공화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어찌 이들뿐이랴.

준엄한 시련의 나날 절세의 위인에 대한 드놀지 않는 신념의 기둥을 심장속에 억척같이 세워놓았기에 김선명, 송상준, 석용화, 리세균, 리경구, 김영만, 고광인 등 남조선에 고향을 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지켜 수십년세월 굴함없이 싸울수 있었고 6. 15공동선언발표이후 혈육이 있는 남조선이 아니라 민족의 밝은 미래가 기약되여있는 사회주의조국의 품, 공화국의 품에 떳떳이 안길수 있었다.

조국은 그들의 가슴에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의 메달을 달아주었으며 옥살이로 당한 비인간적고초의 흔적을 씻은듯 가셔주고 잃었던 청춘생활을 되찾는 만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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