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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일심단결의 나라』중에서 2. 2) 사회적변혁-모든것을 인민에게    -문명의 세계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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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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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일심단결의 나라』중에서

 

2. 민주주의기발아래 뭉치여 인민의 새 나라를

2) 사회적변혁 - 모든것을 인민에게

문명의 세계에로

 

40여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기간 우리 나라는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의 강행으로 하여 현대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암흑천지로, 교육의 불모지로 되였다.

일제의 식민지우매화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전 북조선에는 단 하나의 대학도 없었고 기껏해야 도에 중학교 한두개가 있었을뿐이였는데 그것마저도 지주, 자본가의 자식들이나 공부하는 학교로 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에게서 말과 글까지 빼앗고 배움의 권리를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는 학교들에서 진행한 교육마저도 철두철미 식민지교육으로 일관시켰다.

그리하여 조국이 해방된 직후 우리 나라의 교육실태는 실로 한심한 형편에 있었다. 이때 북반부에만도 성인문맹자가 230여만명에 달하였으며 농촌인구의 거의 전부가 글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도 당시 우리 나라 교육의 후진성을 력력히 찾아볼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해방후 민족교육의 건설은 령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했다.

력사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참다운 교육사업을 떠나서는 그 어떤 사회적진보도, 민족의 번영과 발전도 기대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나라의 렬악한 교육실태와 새 조국건설의 절박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의 확립에로 전체 인민을 조직동원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의 잔재를 철저히 숙청하는 한편 주체34(1945)년 11월 북조선 교육국에서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교육제도수립의 일환으로 《북조선학교교육림시조치요강》을 제정하도록 하시였다.

여기에서는 지난날 지주, 자본가를 비롯하여 유산계급출신의 자녀들만이 공부하게 되여있던 식민지교육제도를 철페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출신의 자녀들은 재산과 직업, 성별, 신앙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부할수 있다는것을 규정함으로써 인민적인 교육제도수립의 전제를 마련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 기회에 진보적민주주의원칙에서 새로운 교육체계와 교양체계를 세우도록 조치를 취하시였다.

그리하여 공화국에는 식민지교육체계가 없어지고 짧은 기간에 소학교와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로 구성된 보통교육체계와 대학들과 연구원들로 구성되는 고등교육체계, 초급기술학교와 전문학교들로 이루어진 기술교육체계가 세워졌으며 교원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들도 설립되였다.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정규교육체계와 함께 대학들마다에 야간 및 통신학부를 내오고 공장기술학교와 야간기술전문학교, 농촌과 가두에는 성인학교와 성인중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배울수 있는 교육체계도 세워지게 되였다.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가 철페되고 새로운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교육제도가 수립되던 시기, 지난날 그렇게도 바라던 근로인민의 배움에 대한 소원이 어떻게 풀리고 배움의 터전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는 연필에 깃든 사연을 통해서만도 잘알수 있다.

주체35(1946)년 2월 20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때 있은 일이다.

해방된 조국땅에 처음 탄생한 인민의 정권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앞에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민주개혁을 실시하여야 하였으며 파괴된 공장들을 빨리 복구하여 생산을 늘이고 식량문제도 해결하여야 하였다. 한번의 회의에 필요한 그 모든 문제를 다 상정할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부터 상정시켜 토의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자기 사업을 무엇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회를 선언하시고 회의의정을 발표하시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 의정으로 연필생산문제가 상정되였던것이다.

회의장분위기를 일별하신 수령님께서는 연필문제를 해결하는것은 단순한 실무적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후대들을 훌륭한 인재로 육성하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여있는 소원을 풀어주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문제라고 하시면서 연필생산을 자체의 힘으로 보장할데 대한 방침과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사실 우리 인민은 과거 글 한자 배우지 못하고 등뼈가 휘도록 일하면서도 자식들에게만은 연필을 쥐여주어 글을 배우게 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제땅을 가지고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하는 농민들의 평생소원과 꼭같은 인민의 간절한 념원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일제통치밑에서 전혀 실현할수 없었던 인민의 이 소원을 풀어주시려는것이였다.

회의의정이 발표될 때만 하여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던 참가자들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이의높은 뜻을 뜨겁게 새기였다.

그것은 단순히 연필생산 그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인민정권기관 일군들로 하여금 교육사업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새롭게 가지며 나라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사업이 바로 무엇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게 한 뜻깊은 의정이였다.

인민교육사업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립장과 관점은 바로 이러하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국의 첫 시기 있는것보다 없는것이 더 많고 국고가 텅 비여있던 어려운 조건에서도 교육의 물질적토대를 마련하는데 모든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돌려주시였으며 이 사업에 전체 인민을 불러일으키시였다.

주체34(1945)년 10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칠골(당시)인민들의 환영모임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교육사업이 가지는 거대한 의의를 강조하시면서 조국의 장래와 후대들을 위하여 학교를 많이 세우자고 절절하게 호소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중학교를 하나 세워보겠다는 칠골인민들의 소박한 의견을 적극 지지해주시면서 몸소 새로 지을 학교터전까지 잡아주시였다. 그후 학교건설에 쓰라고 화물자동차와 여러가지 설비들도 보내주시였고 학교건설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지식과 도덕, 건장한 체력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를 흥하게 해야 한다는 뜻에서 학교이름을 《삼흥중학교》라고 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국가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1946년에만도 국가예산의 17%를 학교건설과 수리비 등 교육비에 돌려주시였으며 삼흥중학교건설의 모범을 전국에 일반화하여 학교건설사업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리도록 이끌어주시였다.

학교건설사업이 새 조국의 장래를 위한 숭고한 애국사업이라는것을 자각한 로동자, 농민, 기업가, 상인 등 각계각층 인민들은 로력과 기술, 자금을 여기에 바치는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6년에 소학교수는 전해에 비하여 1 100여개가 늘어나 2 400여개로 되였으며 학생총수는 87만 8 000명으로부터 118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중학교는 1945년에 44개, 그 학생수는 1만 9 800명이였다면 1946년에는 중학교수가 217개, 그 학생수는 7만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에는 또 1946년에 비하여 학교수는 1.4배로, 학생수는 1.3배로 늘어났다. 그밖에 28개의 여러 중등전문학교들에서 9 7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2개의 사범전문학교와 8개의 사범학교가 세워져 교육사업에 복무할 민족간부를 양성하게 되였으며 김일성종합대학을 모체로 하는 여러개의 단과대학들도 태여나게 되였다.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배움의 종소리가 높이 울리고 어느 집에서나 어린이들의 랑랑한 글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배움의 종소리를 들으며 일손을 다그치고 자식들의 글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피곤을 풀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대교육사업과 함께 성인들의 문맹을 시급히 퇴치하기 위한 문화계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중앙으로부터 리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성인교육지도체계를 세워주시고 마을마다 성인학교를 내오도록 하시였으며 방학기간에는 대학생들까지 각지에 파견하시여 문맹퇴치사업을 도와주도록 하시였다.

이리하여 이미 1946년에 1만 6 178개의 성인학교가 서고 거기에서 55만 6 000명의 근로자들이 공부를 하게 되였다.

성인교육사업은 1947년에 와서 더욱 활발히 벌어졌다.

문맹퇴치운동을 성과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모범을 창조하고 온 나라에 일반화해나가시였다.

주체36(1947)년 8월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분여받은 땅에서 자기 손으로 지은 햇감자와 밀을 알알이 골라가지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온 평강군의 리계산농민을 만나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가 아직 글을 모른다는것을 아시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글을 모르고서는 민주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할수 없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리계산녀성이 장군님의 말씀대로 글을 배우겠다고 말씀올리자 그이께서는 고향에 돌아가면 글을 열심히 배워가지고 금년말까지 자필로 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그것을 나와 약속하자고 하시며 문맹을 퇴치한 다음 전체 인민들에게 문맹퇴치운동을 더욱 힘있게 전개할것을 호소하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석달이 지난 후 그 녀성은 문맹을 퇴치하고 제 손으로 쓴 편지를 수령님께 올리였다.

《… 김일성장군님!

오늘이야 겨우 편지를 올리게 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석달후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신 말씀을 받들고 저는 자나깨나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

편지에는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마음먹고 달라붙어 우리 글을 한자한자 배우던 이야기며 농사를 잘 지어 만기작물현물세를 선참으로 바친 이야기, 소도 매고 돼지도 먹이니 참 재미난다는 이야기며 마을에 중학교도 세우고 구락부와 목욕탕도 지었다는 이야기 등 가정과 마을의 형편이 상세하게 씌여져있었다.

석달전에 문맹자였던 산골마을의 그 농촌녀성이 쓴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잘 쓴 편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나 이악하게 노력하면 안될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친히 그에게 회답을 보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약속대로 석달동안에 문맹을 퇴치하고 편지를 써서 그 소식을 보내준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일을 더 잘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여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당부하시였다.

그 녀성이 수령님께 편지를 올리게 된것을 계기로 평강군 농민들은 군중집회를 열고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릴것을 전국에 호소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펴주신 문맹퇴치운동의 불길은 수만사람들의 심장을 불태우며 도시와 농촌, 벌방과 산골, 온 나라 곳곳으로 세차게 타번져갔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 북조선 방방곡곡에서는 <아는것이 힘이고 무식은 멸망이다!>,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라는 구호를 들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글을 열심히 배우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따라 온 나라 근로자들이 문맹퇴치사업에 떨쳐나섬으로써 1949년 3월에 우리 나라는 동방에서 처음으로 문맹자가 없는 나라로 되였다.

그 나날은 우리 인민들이 높은 정신문명의 소유자로, 새 조선건설의 믿음직한 역군으로 자라나는 나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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