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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2. 1) 공화국의 첫 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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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명철 작성일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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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2. 삶을 꽃피워준 은혜로운 품

1) 나라의 중대사를 맡겨준 믿음

 □ 공화국의 첫 상으로 

새 조국건설의 승리적전진과 더불어 남에서 북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운명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공화국은 정계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자주정치의 활무대를 펼쳐주었으며 과학탐구에 심혈을 쏟아온 사람들에게는 과학의 전당을 마련하여 그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기술자들에게는 파괴된 공장복구와 경제건설에 자기의 열정과 재능을 다 바치도록 해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화국은 정의와 진리의 활무대였고 열백밤을 새우며 일하여도 힘든줄 모르고 자기를 바치고 또 바치고만싶은 희열의 세계였다.

정녕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너도나도 애국할수 있는 반만년민족사에 처음으로 되는 삶의 무릉도원이 공화국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한 주체37(1948)년 9월을 계기로 조선인민은 력사상 처음으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존엄있는 인민으로 되였으며 조선은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로서 국제무대에 떳떳이 나서게 되였다.

삼천리 온 강토가 끝없는 환희와 감격에 넘쳐있던 그때 사람들의 마음을 더더욱 격동시킨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내외에 엄숙히 선포하는 력사적인 자리에서 남조선에서 북으로 들어온 여러 인사들을 초대내각의 부수상, 상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 전해진것이였다.

애국의 마음을 지니였을지언정 그것을 바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황혼기를 맞이한 이들이 어떻게 되여 한날한시에 애국애족의 높은 단상에 오르게 되였는가.

공화국창건이 준비되던 나날 많은 사람들은 나라의 첫 기틀을 마련하여야 할 초대내각의 부수상, 상들은 응당 학력이나 전문분야의 능력에 앞서 혁명투쟁경험이나 혁명성이 투철한 사람들로 꾸려질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혁명선렬들의 뜻과 인민의 지향을 반영하여 공화국을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로 일떠세울 숭고한 사명이 새로 구성되게 될 내각의 부수상, 상들에게 지워져있었기때문이였다. 공화국의 첫 년륜을 새기게 될 그들에게 나라의 흥망과 전도가 달려있는셈이였다.

이런것으로 하여 공화국을 창건하실 때 초대내각을 구성할 중임을 맡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생각은 깊으시였다. 인민의 나라를 세우고저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며 피를 흘려온 전우들의 모습이 되새겨지시였고 해방이 되면 나라의 큰일을 맡아할 재목이라고 점찍어왔던 투사들의 이름도 새겨지시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에 참가한 경력이나 투쟁경험을 앞세우신것이 아니라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꿋꿋이 지켜온것으로 하여 남조선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지고 명망이 높은 홍명희선생, 백남운선생, 리극로선생, 리병남선생과 같이 애국적이면서도 전문분야의 뛰여난 능력을 갖춘 여러명의 남조선출신인사들을 초대내각의 부수상, 상들로 임명해주시였던것이다.

이들은 암담하였던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도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왔고 해방후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을 하려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이 이끄시는 북에 가야 한다는 판단으로 38°선을 넘어온 애국인사들이였다.

공화국의 첫 교육상으로 임명된 백남운선생으로 말하면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애국인사였다.

 

백남운(1897. 3. 19-1979. 6. 12) 국가활동가

해방후 서울에서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사업. 이 시기 조선학술원 원장,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민전의장의 직책을 력임.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 참가. 공화국이 창건된 후 교육상, 주체45(1956)년부터 과학원 원장, 주체56(1967)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 주체61(1972)년부터 사회과학원 부원장으로 사업. 조국통일상수상자.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여난 그는 해방전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경제연구회》라는 비밀소조를 뭇고 학생들속에 선진사상을 보급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자부하는 마음으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망국의 피눈물이 자욱마다 고이던 나날 그는 보천보전투에 대한 특보를 신문지상에서 읽은 다음 그해 겨울부터는 백두광야에서 풍찬로숙하며 항일전을 벌리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따르는 결곡한 마음으로 서재로 쓰는 자기 방에 불을 지피지 않았으며 조선옷을 즐겨 입었다. 그리고 항일혁명투쟁의 영향밑에 《경제연구회》를 《적색연구회》로 이름을 고치고 활동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그는 서울에서 근로인민당창당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이 당의 부위원장, 조선학술원 원장,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민전의장 등의 직책을 력임하면서 정치활동을 벌렸다.

이렇듯 한생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백남운선생이였기에 나라의 분렬을 막고 통일방안을 토의하는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자 지체없이 북행길에 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온 그를 몸소 만나주시고 회의주석단에 앉도록 해주시였으며 3일회의를 할 때에는 그가 련석회의를 집행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왔으며 해방후 남조선에서 통일애국의 뜻을 안고 투쟁해온 사람들가운데는 리극로선생도 있다.

 

리극로(1893. 8. 28-1978. 9. 13) 언어학자, 반일애국렬사, 사회활동가

주체35(1946)년 조선건민회 조직. 주체36(1947)년에는 민주독립당, 민족자주련맹의 요직에서 활동.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 참가. 주체37(1948)년 9월~주체42(1953)년 12월 내각 무임소상, 주체63(1974)년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으로 활동. 원사(1973년), 박사(1970년). 조국통일상수상자.

 

리극로선생은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던 수난의 시기에 의분을 안고 반일의병투쟁에도 참가했었고 《을사5조약》의 무효를 《인정》받기 위해 국제적인 회합에도  찾아갔었다.  그는  보천보전투소식을 듣고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외우면서 남몰래 축배잔을 들기도 하였고 일제식민지통치가 더욱 악랄해지던 때에는 모국어를 지켜내려는 마음으로 애국적인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도 참가하였었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일제의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에는 서울에서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조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조선어학회 복구, 조선말교과서 편찬, 국어강습회조직 등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조선인류학회, 에스페란토학회, 국술협회 등을 조직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였으며 남북합작통일전선위원장으로, 1947년에는 민주독립당, 민족자주련맹의 요직에서 활동하면서 미제의 남조선강점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여 민주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해 힘써왔다.

이런 리극로선생이였기에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자 을사년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북행길에 올랐으며 민주조선건설에 한몸바칠 의욕으로 북에 남게 되였다.

이들은 비록 지난날 반공을 고창해온 우익정객들은 아니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을 리념으로 삼고 살아온 투사들은 더욱 아니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에 남겠다는 그들의 소청을 기꺼이 들어주시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여생을 바치려는 애국애족의 한마음을 소중히 여겨 공화국의 첫 상들로 내세워주신것이다.

남조선에서 들어온 여러 인사들을 공화국의 초대내각의 부수상, 상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 전해진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공화국이야말로 남조선인민들까지도 포함하여 비상히 넓은 사회정치적지반을 가진 전민족적자주독립국가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을 걸으려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져주고 빛내여주는 진정한 인민의 정권이라는 인식을 더욱 깊이 하게 되였다.

남조선에서 들어온 인사들을 초대내각의 상들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조국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맡은 책임을 다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해방전 민족사연구에 뜻을 두고 나름대로의 애국활동을 벌려온 백남운선생도 떠밀어주고 이끌어주는 위인의 손길이 있어 평화적건설시기는 물론 준엄한 전화의 나날에도 공화국의 초대교육상의 책임을 다할수 있었으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의 통일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길에 뚜렷한 자욱을 새겨놓을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교육사업이 걱정되시여 백남운선생을 여러차례 만나주시고 전시교육문제와 관련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에서 갓 돌아온 평양시민들이 방공호에서 새해를 맞던 어느날 그를 또다시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교육사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학생들을 분산교육할데 대하여, 전후복구건설에 필요한 기술간부양성을 위하여 인민군대에 나가있는 대학생들을 제대시켜 공부시킬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교육사업은 전투에 못지 않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어떤 곤난속에서도 교육사업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전시에는 교육사업을 일시 중단하는것과 같은 일이 십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해온 백남운선생으로서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하기에 그는 함께 일하는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선에 총쥔 군인이 한사람이라도 더 요구되는 때에 승리할 래일을 내다보고 전투원들을 후방으로 불러들여 글공부를 시킨 령도자가 동서고금 어디에 있었습니까! 위대한 장군님의 교육사상은 실로 력사에 없었던, 난생처음 보는 특별한 교육사상입니다.》

백남운선생은 교육사업이라는 한 부문을 놓고도 절세의 위인을 모시여 공화국은 전쟁에서 이긴다는 확신이 생겨 뛰고 또 뛰여다녔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전사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가슴아픈 일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분산교육을 하는 여러 학교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교과서출판을 맡은 일군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교육사업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힘이 모자라면 힘을 주고 용기가 모자라면 용기를 주고 지혜가 모자라면 창조적지혜를 안겨주는 절세의 위인의 믿음에 떠받들리여 백남운선생은 그후 과학원 원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사회과학원 부원장의 중임을 지니고 공화국의 륭성번영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칠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위대한 태양의 품, 공화국의 품에서 애국의 길을 찾아 과반생을 헤매였던 리극로선생도 인생말년까지 보람찬 새 삶을 누릴수 있었다.

언어학자이며 사회활동가였던 리극로선생이 내각의 첫 무임소상의 중임을 맡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담겨져있었다.

공화국의 내각을 구성할 때 여러 사람들은 그의 정치활동능력으로 보아 산업상의 중임을 맡기자고 하였었다. 그러나 언제나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해 마음쓰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생각은 다르시였다.

남조선에 있을 때 리극로선생은 어학회, 한글문화보급회, 연무관, 씨름협회같은 비정치단체들로 구성된 건민회와 같은 합법적조직을 통하여 군중들을 결속시키는 사업을 진행한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로부터 남조선의 애국적민주인사들과 인민들속에서 명망이 높고 또 군중과의 사업을 해본 경험도 있는 리극로선생을 공화국의 첫 무임소상으로 임명해주시였다.

그는 남조선에서 통일애국력량을 꾸리기 위한 사업을 더 잘해나가기를 바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 크나큰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남조선인민들을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쳤다.

언어학자이기도 한 리극로선생은 과학연구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수한 우리 민족어의 억양변화를 과학적으로 밝혀 조선어를 규범화하고 문화어를 적극 발전시켜나가는데 적으나마 이바지하기 위해 말년에 스스로 《조선어조연구》라는 제목의 연구과제를 제기하고 그에 심혼을 쏟아부었다. 이 나날에 그는 어조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밝히려면 음악지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알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의 강의실에도 찾아다니였고 여러 지방에 나가 그 지방 사람들의 억양을 채보하여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고령의 나이에 론문집 《조선어조연구》를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발표한 론문집, 이것은 공화국창건의 첫 기슭에서 자신을 무임소상으로, 그후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내세워주었을뿐아니라 민족어발전을 중시하여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과학연구사업을 떠밀어준 절세의 위인의 품, 어머니조국에 드리는 리극로선생의 한생의 총화였다.

진정 지난날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수난에 찬 인생길을 걸어오던 남조선출신의 인사들을 초대내각성원의 위치에 세워주고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준 절세의 위인들의 품이 있어 개개인의 인간의 삶도 빛나고 륭성번영의 조국건설사도 빛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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