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문예물

도서 | 이북도서 『민족중시의 경륜』중에서  4. 3) 민족성원모두를 한품에 안아  -몸소 위로연도 차려주시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19-01-30

본문

이북도서 『민족중시의 경륜』중에서

 

4. 민족의 숙원 통일을 위하여

3) 민족성원모두를 한품에 안아

몸소 위로연도 차려주시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민족의 어버이를 잃은 슬픔이 하늘땅에 사무치던 대국상의 나날 자신보다 해외동포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주시며 그들모두를 애국애족의 길로 내세워주신 이야기는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고있다.

우리 겨레가 너무도 뜻밖에 당한 대국상으로 피눈물의 바다에서 몸부림치고있을 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에서도 조의대표단파견을 요청하여왔다. 그때 공화국정부에서는 다른 나라의 조의대표단은 받지 않는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살고있는 해외동포들에게는 조의방문이 허락되였다.

그 누구보다도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우리 겨레를 먼저 생각하시며 해외동포들의 조의방문길을 열어주시였던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은 비보를 받고 피눈물을 흘리던 해외의 수많은 동포들이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조의방문길에 올라 불원천리 평양으로 달려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모진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어버이수령님을 추모하기 위해 조국으로 달려온 수많은 해외동포인사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주체83(1994)년 7월 14일에만도 한덕수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총련의 조의대표단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달려온 동포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가장 심심한 애도의 뜻에 사의를 표하시였으며 그들과 동포애의 정이 넘치는 담화를 나누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을 못 잊어 해외에서 수만리길을 거쳐 조의를 표시하겠다고 해외교포조직대표 및 교포인사들이 많이 와있는것만큼 그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시며 그들의 숙식조건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릴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생각으로 해외동포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한 다음 추도대회때에만 장군님께 간단한 인사를 드리도록 하는것으로 행사계획을 세웠었다.

이 사실을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령전에 그들이 조의를 표시할 때 내가 호상을 서겠다고 하시며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고 영결하겠다고 찾아온 그자체가 수령님에 대한 뜨거운 흠모의 정의 표시이고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숭배심의 표현이라고, 나는 그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할 때 호상을 서고 다 만나주겠다고, 이미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였다 하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해외에서 온 우리 동포들을 이제 다 금수산의사당으로 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오늘 조국에 도착한 대표단을 포함하여 이미 조국에 와있는 전체 해외교포성원들도 다 만나주겠다고 하시였다.

사실 해외동포들은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는 동시에 위대한 장군님께 위로의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조국에 오는것이다. 민족의 어버이를 뜻밖에 잃은 엄연한 현실앞에서 수령님 그대로이신 장군님을 만나뵙고 인사를 드리겠다는것이 상실의 슬픔과 함께 그들의 가슴을 꽉 채운 소망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안고계시면서도 그들의 가슴속깊이에 간직된 소망을 헤아리시여 해외동포들을 일일이 다 만나 뜨겁게 손잡아주시며 사의를 표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렇듯 해외동포조문단과 조객들을 따뜻이 맞아주시고 체류기간 불편한 점이 없도록 보살펴주시였을뿐아니라 력사에 류례없는 위로연까지 마련해주시였다.

피눈물속에 해가 뜨고 달이 지던 7월 16일이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해외의 거의 모든 조직들에서 대표들과 동포명류인사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고 나에게 위문의 인사를 하겠다고 온것만큼 그들을 다 잘 대해주어 보내야 하겠다고, 총련에서 온 성원들을 위한 연회를 차려야 하겠다고, 그리고 추도대회가 끝난 20일 저녁에는 총련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해외교포조직대표들과 인사들을 위한 연회도 목란관에서 차려주어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마음속으로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위로연이라고 하면 정신육체적으로 당하고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풀어주기 위하여 차리는 연회라고 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로연은 마땅히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 계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위로하여 우리 민족이 차려드려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조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온 동포들모두를 자신과 꼭같이 어버이를 잃은 상제로 여기고 그들에게 위로연을 차려주도록 하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7월 19일 어버이수령님과의 영결식이 엄숙히 거행된데 이어 총련조의대표단, 조국에 체류하고있는 총련일군들과 동포들을 위한 위로연이 진행되였고 20일 저녁에는 총련을 제외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해외동포조직대표들과 인사들을 위한 위로연이 진행되였다.

아무리 겨레를 생각한 위인이 있었다 해도 대국상의 나날에 해외동포들을 위하여 위로연까지 마련해준 사실을 그 어느 나라 력사도 일찌기 알지 못하고있었다.

위로연의 연회상을 마주한 해외동포들은 어버이수령님이 사무치게 그리워,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누르시고 오히려 동포조객들인 자기들의 슬픔을 먼저 헤아려 위로해주시는 장군님의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 울고 또 울면서 자기들의 격정을 토로하였다.

최홍희 국제태권도련맹 총재는 《나는 모든 해외동포들이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을 높이 모시고 통일성업에 매진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저 하며 이 길이 바로 김일성주석의 념원을 실현하는 길임을 일러두고저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해외동포인사들도 일치하게 김일성주석의 생전의 뜻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사는 더없는 영광에 대하여, 그이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조국통일성업에 모든 힘을 다 바칠데 대하여 격조높이 말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마련된 위로연은 해외동포들로 하여금 슬픔을 이겨내고 애국애족의 길로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힘과 용기를 안겨준 뜻깊은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국상의 나날 한 해외동포를 위하여 생일연회도 마련해주시였다.

주체83(1994)년 8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재미동포 손원태에게 80돐 생일상을 안겨주시였다.

손원태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옛 길림시절에 인연을 맺으신 손정도목사의 아들이였다. 수령님께서 길림에서 헤여지신이래 그와 다시 만나신것은 주체80(1991)년 봄 어느날이였다.

그날 해외에 살고있는 그를 조국으로 불러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생일을 한번도 차려주지 못한것을 두고 못내 서운해하시면서 80돐생일상만은 형님으로서 성의껏 차려주겠다고, 그때 조국에 와서 생일을 쇠라고 교시하시였었다. 주체83(1994)년 5월 어느날에도 일군들에게 그의 80돐생일상을 잘 차려주자고 하시면서 생일날에 줄 선물까지 마련해놓으시였다.

그러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너무도 갑자기 서거하시였다는 비보를 받고 도저히 믿을수 없었던 손원태는 줄곧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며 공화국으로 달려왔다.

조의식장에서 그를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멀리 타향에서 수고로이 와주어 고맙다고,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선생님의 80돐생일을 크게 쇠드리겠다고 하시였는데 참으로 안되였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한다고, 저는 수령님의 친지들을 항상 잊지 않겠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는 비길데 없는 상실의 아픔을 안고계시는 장군님께서 자기의 생일까지 관심을 돌리시는것이 너무도 고마와 더욱 목이 메였다.

그가 80돐생일을 맞는 날이였다.

이날 이른아침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명의로 된 꽃바구니와 대형과일바구니 그리고 그와 부인에게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선물과 축하의 인사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 저녁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그의 생일에 즈음하여 마련해놓으신 선물인 대형보석화 《송학》을 전달하게 하시고 생일 80돐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까지 차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여 어버이수령님의 생전의 사랑이 그대로 뜨겁게 이어지고있음을 절감한 그는 생일상을 받고 자기의 심중을 이렇게 터치였다.

《참으로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은 그대로 김일성주석이시며 백의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십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비록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의 곁을 떠나시였지만 우리 7천만백의민족에게는 수령님의 위업을 빛나게 이어가시며 우리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분께서 계십니다.》

대국상의 나날 력사에 류례없는 위로연에 참가하여 힘과 용기를 가다듬고 애국애족의 길을 걸은 사람들속에는 녀류기자 문명자도 있다.

그는 한때 미국의 백악관출입기자로 활약한 경력도 있고 세계 여러 지역을 밟으면서 예리한 분석과 째인 론리로 자기의 정치적견해를 밝힌것으로 하여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속에서는 물론 서방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녀성문필가였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미국의 끈질긴 고립압살책동에 맞서 추호의 동요나 좌절도 없이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켜내는 공화국의 현실은 경이의 대상, 동경의 대상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올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 그의 가슴속에는 20세기의 정치사를 주도해오신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자리잡혀졌다.

그런 그가 대국상의 소식에 접한 길로 평양에 달려와 조의식장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뵈옵고 더우기는 위문을 온 조객이 오히려 위문을 받는 세상에 있어보지도 듣어보지도 못한 위로연에 참가하여 받은 충격은 남다른것이였다. 특히 그는 조선기록영화 《인민을 위한 길에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를 보고 장군님의 위인상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였다.

그후 그는 주체89(2000)년 6월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다시금 만나뵙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우리가 만났던 때로부터 이제는 6년이 되였다고 하시면서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시였을 때 녀사를 만나 악수를 한 기억이 있다고, 그 다음에는 내가 시간을 낼수 없어 편지를 써보낸적이 있다고, 그 편지에서 앞으로 조국을 다시 방문하는 기회에 꼭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는데 나는 늘 그 약속을 잊지 않고있었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주 녀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였다고, 특히 1994년 4월 주석님께서 녀사를 만나주신 후에 여러차례의 말씀이 계시였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오래전부터 녀사를 만나보려고 생각하였다고, 내가 이미전부터 녀사를 만나주겠다고 한 빚을 지고있었는데 이번에 그것을 갚자고 이렇게 시간을 냈다고 하시였다.

이날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에 대하여서와 조미관계문제를 비롯하여 그가 관심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말씀해주고나신 장군님께서는 헤여질 때에는 다리가 불편한 그를 도와 몸소 승용차에 편히 오르도록 보살펴주기까지 하시였다.

참으로 민족의 대국상속에서도 해외동포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일어서도록 위로연까지 차려주며 보살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신 김정일장군님의 품이 있어 해외동포들은 통일을 위한 애국애족의 길을 과감하게 걸어나갈수 있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Copyright © 2001 - 2019 반제민족민주전선 《구국전선》편집국 All rights reserved.
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