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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2. 1) 한생을 룡남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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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명철 작성일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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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2. 삶을 꽃피워준 은혜로운 품

1) 나라의 중대사를 맡겨준 믿음

□ 한생을 룡남산과 함께

 

평양의 아름다운 명승지 모란봉의 북부에 잇달려 구릉을 이룬 룡남산을 품어안고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있다. 룡남산은 김일성종합대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룡남산에 오르시여 종합대학터전을 몸소 잡아주시였으며 주체49(1960)년 9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해솟는 룡남산마루에 오르시여 조선혁명 책임진 주인이 되여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하실 굳은 결의를 다지시였다. 주체혁명의 성스러운 력사가 아로새겨져있는 룡남산은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정중히 모시여 더더욱 빛을 뿌리고있다.

오늘도 룡남산기슭에 거연히 솟아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자랑스러운 력사에는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들어온 이후 한생을 룡남산과 더불어 삶의 자욱을 빛나게 수놓으며 민족간부육성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로새겨져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직후 새 조국건설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민족간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체의 민족간부양성기지로서의 종합대학을 세울데 대한 문제를 발기하시고 이 사업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처음으로 종합대학을 창설할데 대한 구상을 천명하신것은 나라가 해방된지 얼마 안되였던 주체34(1945)년 11월 3일 교육부문 일군들과 하신 담화 《종합대학을 창설할데 대하여》에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선을 건설하려면 많은 민족간부가 있어야 하며 이것은 조국의 현실이 요구하는 가장 절박한 문제의 하나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자신께서 오래전부터 구상하여오신 대학창립의 길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새 조국건설에 필요한 간부들을 하루빨리 양성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들을 많이 세우는것과 함께 대학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에서는 많은 대학을 한꺼번에 세울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합대학부터 먼저 내와야 하겠습니다.》

종합대학부터 먼저 세워야 한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접하는 순간 그자리에 모인 일군들은 꿈을 꾸는것만 같아 어리둥절해하였다.

(대학을 내오다니?! 그것도 종합대학을…)

그때는 아직 누구도 민족간부양성문제를 그처럼 절박한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고있었고 대학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교육부문의 일군들자체도 민족간부를 많이 키워내자면 전문학교형식의 단과대학이라도 가능한껏 많이 세워야 한다는 피상적인 생각에 머물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종합대학을 창설하는것은 오늘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절실히 필요한것이라고 다시금 강조하신 다음 종합대학을 창설하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일할 간부들을 동시에 양성할수 있다고, 또한 종합대학을 먼저 창설하면 그것을 토대로 하여 앞으로 빠른 기간에 많은 대학을 세울수 있을것이라고, 종합대학은 우리 나라의 튼튼한 민족간부양성기지로 될것이며 앞으로 내올 대학들의 모체로 될것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새 조국건설의 바쁘신 가운데서도 종합대학을 빠른 시일안에 우리 자체의 힘으로 세워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지니시고 종합대학창설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시였다.

인민의 첫 종합대학을 창설하는 사업은 많은 어려움을 동반하였다.

종합대학을 창설하려면 그만큼 여느 단과대학을 내올 때보다 유능한 교육일군들이 많아야 했고 교육조건도 곱절 필요했으며 교육경험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형편에서는 대학교육을 담당수행할만 한 교육일군도 없었고 대학을 관리운영해본 경험도 없었으며 대학창설에 필요한 물질기술적토대도 전혀 갖추어져있지 않았다.

그러나 종합대학을 창설하기 위한 사업을 인민들의 애국열의와 슬기를 온 누리에 떨치는 민족사적위업의 하나로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난을 물리치시고 이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합대학을 창설하고 운영하려면 교원문제부터 해결하여야 한다고 보시고 우선 북조선에 있는 학자들을 다 데려오고 서울에 있는 선진적인 학자들도 데려와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당시 남조선의 교원, 학자들은 미제가 《국립서울대학교안》이라는것을 발표하고 대학들을 페교하고 진보적인 학자들을 무리로 교단과 연구실에서 내쫓자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있었다. 많은 교원들이 민주의 락원으로 꽃펴나고있는 북에 가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일제의 민족교육말살책동으로 북에는 교육자의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그들이 발붙일 교육의 터전이 별반 없었던것이다. 종합대학창설은 새 조선의 민족교육의 터전을 닦는 출발이기도 하였다.

평양에 종합대학이 세워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녘의 많은 교원, 학자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편지를 올려 북조선에 들어와 민족간부양성사업에 참가하고싶다는 열망을 표시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소망을 헤아려주시여 그들모두를 데려오도록 은정어린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 문제를 나라의 인재들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하며 그들의 운명을 빛내여주기 위한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시고 데려오는 사업을 잘하도록 하시였다.

남조선의 교원, 학자들은 종합대학창설을 발기하시고 지난날 일제에게 복무한 자기들을 민족교육의 높은 교단에 믿고 내세워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뜻에 감격을 금치 못하며 앞을 다투어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달려온 사람들중에는 서울에서 대학교수로 있던 도상록선생도 있었다.

 

도상록(1903. 10. 13-1990. 2. 13) 물리학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초대학부장(1946년), 연구원 원장(1948년), 물리강좌장(1953년), 핵물리강좌장(1954년)으로 사업. 공화국의 첫 원자력부문 교육과학단위 책임자로서 새로운 과학분야의 교과서, 참고서 30여종을 집필, 실험장치들을 연구개발. 《김일성훈장》수훈자, 과학원의 첫 물리학부문 원사(1952년), 교수(1950년), 인민과학자(1986년).

 

일찌기 남다른 향학열을 안고 높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던 도상록선생이였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악랄한 민족차별정책으로 과학탐구의 길을 찾을수 없었다. 하여 그는 만주로 가서 조국이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가 운영하는 어느 한 대학에서 온갖 민족적멸시와 박해를 받으며 교편을 잡았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우리 민족이 남에게 예속되지 않으려면 많은 과학기술인재들을 육성해야 한다는 자기딴의 생각을 가지고 서울의 어느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애국적인 학자들과 함께 교수진영도 꾸리고 실험실들을 정비하는 사업에 남먼저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러나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가 병영으로 쓰겠다고 하면서 교사를 점령하고 귀중한 실험기구들을 창문밖으로 마구 던져버리는데 항거해나섰던 그는 그만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평양에 종합대학을 세운다는 소식에 접한 그는 당장 북으로 가서 교육과 과학탐구에 자기의 지식과 열정을 쏟아붓고싶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복무한 떳떳치 못한 과거로 하여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를 불러주시였다.

주체35(1946)년 7월 23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으로 온 도상록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더운 날씨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였다고, 몸은 건강한가고 하시며 몸이 건강해야 새 민주조선건설에 이바지할수 있다고 하시였다.

온 민족이 우러러 경모하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는것만도 영광인데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서까지 걱정해주시는 그이의 따뜻한 인정에 그는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도상록선생에게 북조선에서의 종합대학창설에 대하여 알려주시고나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선생이 종합대학창설사업과 민족간부양성사업에서 한몫할것을 바라고있습니다.

대학을 창설하고 운영하는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교육내용을 옳게 구성하는것입니다.

교육은 사람을 육성하는 사업이며 교육내용은 교육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대학의 교육내용을 옳게 구성하여야 학생들을 훌륭한 민족간부로 육성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의 교육내용을 구성하는데서 다른 나라들의것을 그대로 본따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교육을 할수 있도록 대학의 교육내용을 구성하여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물리학이 공업을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만큼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부터 깊은 지식과 실천능력을 가지도록 물리학부터 우리 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지난날 과학에는 네것내것이 따로 없고 남의 지식도 터득하면 제것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학문적지식을 남보다 많이 쌓아 학계의 높은 권위를 차지하려고만 노력하여왔던 도상록선생이였다. 그러다보니 나라의 공업을 떠나 학문탐구에만 몰두하는 버릇이 붙게 되였다.

이러한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과학을 가지고 우리 식의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시며 학문탐구를 우리의 공업발전과 련관시켜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신것이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도상록선생을 믿음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선생이 종합대학을 창설하고 민족간부를 양성하며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도상록선생은 민족간부를 키워내는 성스러운 교단, 첫 인민의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보람찬 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교육과 과학탐구사업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칠수 있도록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학자로서 많은 일을 하자면 과학발전의 세계적추세를 알아야 할것이라고 하시며 도상록선생을 외국에도 보내여 견문을 넓혀주기도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6(1947)년 10월 대학창립 1돐을 기념하여 꾸려놓은 전람회장의 물리전람실에 몸소 나오시여 대학에서는 실험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물리학이 기초과학이라고 하여 실험을 홀시하여서는 안된다고, 교원들은 물리학의 원리들과 법칙들을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실험을 통하여 생동한 표상을 가질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8(1949)년 12월 물리수학부에서 첫 졸업생을 내게 되였을 때에도 몸소 대학에 나오시여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첫 졸업생들을 내보내게 되였으니 감회가 깊겠다고,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치하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시기에도 도상록선생의 과학연구사업정형을 알아보시고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과학연구사업을 잘 추진시켜야 한다고 고무도 해주시였다.

도상록선생을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전후 언제인가 일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할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도상록선생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짚신을 신고 당을 끝까지 따라온 과학자이고 진정한 혁명가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또한 70번째 생일을 맞는 그에게 생일상도 차려주시고 귀중한 선물도 안겨주시였으며 주체65(1976)년 11월 대학을 찾으시여서는 그가 나이때문에 귀를 잘 듣지 못하는것을 못내 걱정하시며 그를 자신의 가까운 곳에 앉히시고 교육과학사업을 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과업들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5(1986)년 김일성종합대학창립 40돐을 맞으며 또다시 대학을 찾으시였을 때에도 도상록선생의 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아직도 강의를 하는가고, 대단하다고 하시며 그를 자신의 가까이에 세우시고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은 도상록선생에게 있어서 친근한 스승이시였고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으며 은혜로운 어머니품이였다. 이 위대한 품에서 그는 《김일성훈장》수훈자,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로 자라날수 있었으며 수많은 과학기술인재들을 양성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단에서 한생을 빛내인 도상록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자신의 명의로 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으며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하시고 조선혁명박물관에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집필한 주요책들, 론문들을 전시해놓아 인민이 영원히 추억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룡남산과 더불어 자기의 한생을 빛내인 학자들가운데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원사, 교수, 박사인 전용식선생도 있다.

 

전용식(1920. 7. 26-1999. 2. 18) 경제학자, 교육자

주체40(1951)년 12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원, 주체52(1963)년 7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 강좌장, 연구사로 사업. 경제학부문 심의위원회 위원장, 경제학회 회원으로 오래동안 사업. 경제리론도서 10여권과 교과서, 참고서들, 100여건의 과학연구소론문들을 집필출판. 《김일성상》계관인(1992년), 로력영웅(1995년), 원사(1992년), 교수(1965년), 박사(1981년).

 

경상북도 달성군(당시)에 태를 묻고 자라난 그는 중학교시절부터 이곳저곳에서 가정교사로, 잡일로 품팔이를 하면서 대학까지 졸업한 식민지지식인의 한사람이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짓밟혔던 민족의 후대들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려는 푸른 꿈을 안고 대학교단에 섰었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교육자로서의 그의 량심은 무참히 짓밟혔고 자기의 소중한 꿈을 실현할수 없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전용식선생은 비로소 자기의 리상을 실현할수 있었다.

공화국에서는 민족의 장래를 떠메고나갈 후대들을 교육교양하는 사업에 자기의 열정을 다 바치려는 그의 소망을 헤아려 그를 교육자대렬에 세워주었다.

그처럼 소원하던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단에서 후대교육사업에 자기의 열정을 다 바치며 전용식선생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보람을 마음껏 누리였다.

그 나날 그는 지식인들이 자기의 재능을 참답게 꽃피우고 보람찬 삶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지식인을 알아주고 그들의 운명을 책임져주고 이끌어주는 위대한 령도자의 품에 안겨야 한다는것을 온몸으로 절감하였다.

더우기 그는 1960년대 전반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교육사업을 하는 과정에 이 진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일찌기 우리 나라에도 훌륭한 대학이 있다고, 자신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결연히 선언하시고 룡남산마루에 서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 배워 조선혁명을 책임진 주인이 되리라는 숭엄한 맹세를 다지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

그날의 맹세를 안으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의 자욱을 새겨가시던 나날에 심오한 사상리론활동과 혁명실천으로 시대와 혁명, 조국과 인민앞에 특출하고 빛나는 업적을 쌓아올리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대학일군들과 교원, 학생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시고 때로는 고전적로작들을 집필하시면서 선행리론에 대한 교조주의적이며 사대주의적인 태도와 표현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리론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백방으로 옹호론증하도록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그 나날 력사학분야에서 신라에 의한 세나라통일문제가 다시 검토되고 철학분야에서 자본주의변호론이 여지없이 분쇄되였으며 자연과학분야에서 조선식환상을 가지고 미지의 과학세계를 점령해나가며 사회주의건설에서 지역적거점으로서의 군의 역할과 주체적인 경제학발전의 새로운 앞길이 열려지는것과 같은 교육내용에서의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가 있어 민족간부양성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사업전반에서 전변이 일어나게 되였고 대학의 교원들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활기에 넘쳐 교수교양사업을 마음껏 벌려나갔다.

전용식선생도 언제나 사색을 하고 강의를 하여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주체적인 사상리론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언제인가 전용식선생이 조선로동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대하여 해설한적이 있는데 그가 한 강의는 청강생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기였다.

그가 한 강의는 전해의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중공업의 우선적장성을 보장하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의 독창성에 대하여 그리고 인민소비품생산에 힘을 집중할데 대한 당면한 과업이 제기되여도 우리 당의 로선에는 변함이 없다는데 대하여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전개한것이였다.

전용식선생은 그후에도 이렇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사상리론들을 지침으로 삼고 농업협동화에서 우리 당이 견지한 주체적립장이며 새로운 공업관리체계의 독창성, 우리 당의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의 정당성 등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전용식선생이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이끌어주시고도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잊지 않으시고 그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자기의 진정을 담아 쓴 소박한 편지와 자신의 한생의 총화로 되는 부피두터운 교재를 보내왔을 때에도 그 모든것을 몸소 보아주시였으며 생일 60돐상을 보내주신데 이어 그가 생일 70돐을 맞이할 때에는 또다시 사랑의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그 사랑속에 전용식선생은 《김일성상》계관인으로, 로력영웅으로, 원사, 교수, 박사로 자라날수 있었다.

지식인들의 존엄과 영예를 빛내여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끝이 없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로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승리적으로 이끌어나가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주체85(1996)년 12월 몸소 창립 50돐을 맞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으시여 전용식선생이 쓴 강의안을 몸소 보아주시였으며 그를 비롯한 대학의 로교수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참으로 룡남산과 더불어 한생을 빛내인 오랜 지식인들이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은 공화국이야말로 지식인모두의 운명을 꽃피워주는 참된 삶의 품이라는 진리를 민족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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