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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1) 재북인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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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명철 작성일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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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3. 영원한 생의 보금자리

 1) 영생의 언덕

□ 재북인사묘

 

평양시 룡성구역에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참된 삶을 누리면서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사망한 재북인사들의 유해를 안치한 묘지가 있다.

재북인사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민족적량심을 지켜 리승만괴뢰도당을 따라가지 않고 공화국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들가운데는 남북협상파인사들과 《국회소장파》, 《서울잔류파》정치인들도 있으며 지난날 나라와 민족앞에 큰죄를 지은 인물들도 있다.

각이한 인생행로를 따라 운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그들이 어떻게 민족의 대하라는 격류에 합쳐졌고 어떻게 나라의 자주통일을 위한 길에 나서게 되였으며 어떻게 되여 죽어서도 영생의 언덕에 한식솔인양 나란히 자리잡게 되였는가.

돌이켜보면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재북인사들에 대하여 그들이 생존해있을 때의 사업과 생활은 물론 사후처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극진한 관심과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재북인사들의 신변과 생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끝나자 자강도에 있던 재북인사들을 평양부근에 데려다가 생활도 안착시켜줄데 대하여서와 기름, 두부, 고기 등 부식물도 떨구지 말고 정상적으로 보장해줄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필요한 모든 조치들을 다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주체42(1953)년 11월말 재북인사들모두는 수령님의 은정이 깃들어있는 외투와 모포, 모자, 신발, 면직물들을 받아안게 되였으며 그 이듬해 3월에는 자강도에 남아있던 재북인사들모두가 평양으로 올라오게 되였다.

재북인사들은 나라의 여러곳에 우후죽순처럼 일떠서는 여러 공장, 기업소들에 대한 참관도 진행하고 금강산, 온포온천에서 정휴양도 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였다.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도 자신들을 위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에 감동을 금치 못한 재북인사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 특히 통일애국의 길에 적극 떨쳐나섰다.

1955년 11월 오하영, 윤기섭, 조소앙, 송호성, 안재홍, 엄항섭선생들이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 남반부의 각계 인사들이 적극 떨쳐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는 6인공동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모든 재북인사들은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한몸 바칠 일념으로 1956년 7월초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를 결성하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남북협상파세력을 비롯한 입북인사들이 이전의 통일촉진협의회가 못다한 사명을 계속 수행해나가는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통협》은 남조선의 《정부》와 《국회》 및 각 정당, 단체들은 물론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단체들에 보내는 편지, 호소문, 내외기자들과의 회견, 출판선전물발간, 방송출연 등 각종 형식과 방법으로 조국통일의 절박성을 주장하고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의 반통일적이고 반인민적이며 외세의존적인 죄행을 고발단죄하는 정치선전활동을 적극화하였다.

재북인사들의 자원적인 통일애국조직으로서의 《통협》의 결성과 그 활동에 큰 의의를 부여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6(1957)년 10월 25일 《통협》의 최고위원들과 상무위원들을 만나시여《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조국통일위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면서 《통협》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높은 급의 대우를 해주시는 등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여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기대와 관심, 뜨거운 사랑속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결성후 조국통일위업에 기여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지난 수십년간 《통협》은 조국통일운동사에서 격동적인 사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고 북남관계상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계기마다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의 만고죄행을 성토하는 격문, 죄행록, 고발장, 호소문, 편지 등을 내여 내외여론을 통일을 지지하고 반통일세력을 고립약화시키는데로 선도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통협》에서  진행하는  이러한  사업을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들의 련공인생을 력사와 더불어 빛내주시기 위해 마음쓰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통협》성원들의 사후처리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통협》회원이였던 백상규선생이 받아안은 생전의 특전과 사후의 특대조치는 재북인사들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것인가 하는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백상규선생으로 말하면 대부호로서 남조선에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있었으며 2대《국회의원》이였다.

주체39(1950)년 9월 입북의 길에 오른 그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된 후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속에 상무위원들과 꼭같은 공화국정부 부상급대우를 받으며 부럼없는 생활을 하였다.

주체46(1957)년 6월 어느날 《통협》의 최고위원 안재홍선생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원들가운데서 우리의 조국통일방안을 가지고 남조선에 가서 전달하고 올만 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고 물으시였다.

안재홍선생이 신중히 생각을 굴리는데 수령님께서는 안재홍선생이 갔다오면 좋겠지만 놈들이 눈독을 들이기에 신변이 위험해서 보낼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 사람의 말이면 안재홍의 말이나 마찬가지다 하고 인정할만 한 사람을 선발했으면 좋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백상규선생이 어떻겠는가고 물으시였다.

순간 안재홍선생은 저으기 놀라운 기색으로 그 사람은 이름난 대부호이고 또 다년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니 믿을수 있겠는지 하는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내 생각에는 그가 결코 변절할 사람 같지는 않다, 사람은 우선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통일을 못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날  안재홍선생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절대적인 믿음에 대한 말씀을 전해들은 백상규선생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수령님, 저같은게 뭐라고,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격정의 말을 터뜨리였다.

그후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의 악랄한 방해책동으로 하여 백상규선생이 남조선으로 갔다오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는 생전에 받아안은 절대믿음이라는 최상의 특전을 잊지 않고 통일애국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백상규선생이 불치의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병원원장을 전화로 찾으시여 백상규선생의 병치료에 최선을 다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선생이 고령에 침상에 누워있으니 얼마나 가족이 그립겠는가, 남조선적십자사에 통지하여 선생의 가족들이 와서 간호하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은정어린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고마운 조치를 전해들은 백상규선생은 국사에 바쁘신 그이께 근심을 끼쳐드려 송구스럽기 그지없다고 하면서 남조선에서 가족들을 보내주는 인도주의적조치를 취해주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의 거부로 백상규선생은 끝내 가족과의 상봉을 이루어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석한 심정을 금치 못하신채 백상규는 남조선에서 이름난 갑부의 한사람으로서 적십자사 부총재를 하였기때문에 남조선사회계에 일정하게 알려져있다고, 그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이후 비교적 량심적으로 살았다고, 백상규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평양방송으로 내보내야 하겠다고, 고인의 유해를 장례식전후를 막론하고 가족들이 운장하는것을 쾌히 승낙하였으니 어느때라도 가능한 시기에 판문점을 통하여 운구하여가기를 바란다는것을 알려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부고를 받은 백상규선생의 처와 아들딸들로부터 고인의 시신을 운장하겠다는 답전이 왔으나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운장할수 있다는 식으로 까박을 붙이며 그것을 이렇게저렇게 방해해나섰다.

하여 공화국에서는 제 나라, 제땅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가져다 묻겠다는데 국제적십자사가 무슨 상관인가고 남조선당국자들을 엄하게 추궁하는 성명을 내고 백상규선생의 장례를 크게 치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상규선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하며 시신을 평양시교외의 풍치좋은 곳에 안장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까지 보내주시는 사랑의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처럼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이 있었기에 백상규선생만이 아니라 안재홍, 김칠성, 박승호, 조헌영, 김의한, 명제세선생을 비롯한 수십여명의 《통협》회원들이 생전에는 행복과 영광을, 사후에는 애국지사의 값높은 칭호와 함께 풍치좋은 곳에 정히 안장되게 되였다.

재북인사들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단지 《통협》회원들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였다.

재북인사들중에는 전쟁때 북으로 들어오다가 도중에 적기의 폭격에 죽었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동행하던 사람들은 형세가 급박하였으므로 비석이나 상석은 고사하고 안장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모를 산과 들에 흩어져 무주고혼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군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망각을 만들어낸다고 고인들에 대한 슬픈 추억도 시간의 날개를 타고 멀리 날아가버리였다.

하지만 수십년세월이 흘러갔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잊지 않고계시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재북인사들가운데서 평양에 묘지가 없는 사람들을 장악하고 그들의 유골들을 다 찾아다가 평양교외의 풍치좋은 곳에 안장하며 비석과 상석도 잘해줄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해당 부문에서는 평양에 묘지가 없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그 명단에 올린 사람들가운데는 지방에 분명한 묘가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디서 죽었는지, 묘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무슨 일부터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묘지이설문제와 관련한 명확한 방향과 방도들을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인원들을 동원하고 수송조직을 빈틈없이 하며 평양석재공장에서 비석과 상석을 제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힘을 동원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의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유골을 이송해오는 사업이 적극 추진되였다. 그러나 수십년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해당 부문 일군들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북행길에 올랐다가 미제의 야수적인 폭격에 의해 희생된 정인보선생의 사망지를 찾았을 때였다.

거기에는 드넓은 강냉이밭이 펼쳐져있었다. 미제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하여 묘지가 흔적조차 없어졌던것이다.

사실 정인보선생으로 말하면 완고한 민족주의자였고 해방직후 괴뢰정부의 감찰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낸바 있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의 과거가 어떻든지간에 공화국의 품을 따라나선 그 사실자체를 두고 그를 애국지사로 평가해주시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생을 값높이 빛내주시려고 그렇듯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신것이다.

해당 부문의 일군들은 넓은 면적의 밭을 샅샅이 훑어 끝끝내 정인보선생의 유해를 찾아냈다.

정인보선생의 유해를 평양에 운장한지 얼마 지나서 그와 사돈간이였던 홍명희선생이 묘소를 찾아왔다.

정인보선생의 유해를 찾던 과정을 상세히 듣고난 홍명희선생은 어버이수령님 같으신분이 아니시고서야 어찌 생각이나 할수 있는 일인가고, 세상에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은 없다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묘소주변을 한참이나 돌아보았다.

홍명희선생은 잘 다듬어세운 비석과 상석을 손으로 거듭 쓸어만지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게 인보, 남쪽에 있었더라면 어찌 이런 훌륭한 명당자리에 누워있겠나. 서울에서는 날더러 공산주의자를 따라간다고 못마땅히 여기던 자네도 내가 온 길을 따라왔으니 오래 못산것은 미국놈탓이고 인생의 마무리야 잘한셈이지. 암 잘한셈이야.》

홍명희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곁에 있던 사람들은 민족의 어버이의 위대한 품, 그 품에 안기면 값높은 애국의 인생을 살수 있고 죽어서도 빛나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깊이 느끼게 되였다.

지난날 나라와 민족앞에 큰죄를 지은 작가 리광수도 절세의 위인들의 한없이 넓은 도량에 의하여 경치좋은 곳에 안치되게 되였다.

리광수로 말하면 젊은 시절에 반일독립에 뜻을 둔 촉망되는 작가로서 한때 문단의 시선을 모았으며 상해《림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주필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로 돌아온 뒤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쓰고 일제에게 전향한것으로 하여 겨레의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러한 그였지만 인생말년에나마 참답게 살 용단을 내리고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북행길에 올랐었다.

그런데 후퇴도중 오래동안 앓던 병이 도져 1950년 10월말 만포근방에서 불행하게도 숨지고말았다. 그때 동행하던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이름모를 언덕진 곳에 안장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흐른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리광수의 유해를 찾아내여 다시 안치할데 대한 과업을 일군들에게 주시였다.

여러 경로를 통한 수소문끝에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을 찾아낸 일군들에게는 또 하나의 난처한 일이 생기였다.

리광수의 시신이 묻힌 곳이라고 확증된 근방에 농촌문화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앉았던것이다.

그의 유해를 찾자면 문화주택을 헐어야만 했다.

리광수의 유해를 찾는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에도 죄많은 친일분자의 유골을 어떻게 애국인사들과 나란히 안장하겠는가고 은근히 속으로 생각하던 일군들인지라 문화주택을 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그가 지은 죄를 몰라서 그러는것은 아니다, 인생말년에나마 북행길에 오른것은 우리를 따르려 했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 어제까지 죄를 지었어도 오늘부터 개심하고 따라오면 용서하고 너그럽게 안아주는것이 우리 수령님의 품이고 우리 혁명가들의 도량이다, 그런 넓은 도량이 없이는 통일을 못한다, 그러니 그에게도 다른 북행인사들과 꼭같이 묘를 잘해주어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이렇게 경애하는 장군님의 넓은 도량에 떠받들리워 문화주택을 옮겨짓고 찾아낸 리광수의 유해도 평양교외의 경치좋은 곳에 묻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군령도의 그 바쁘신 나날에도 재북인사들의 사업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이미 세상을 떠난 재북인사들의 묘소를 잘 꾸려주며 천연화강석묘비에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돌사진으로 형상하여 새기도록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애국의 길에 바쳐진 삶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빛내여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에 떠받들려 주체93(2004)년 6월 평양시교외의 아늑하고 풍치수려한 곳에 수십여명의 재북인사들의 묘소가 잘 꾸려지고 천연화강석묘비에는 그들의 생전의 모습이 돌사진으로 새겨지게 되였다.

대부분이 상해《림시정부》와 미《군정》 그리고 남조선괴뢰당국의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였지만 때늦은 애국의 소행을 소중히 여겨 영구불변의 돌사진까지 새겨넣은 그들의 묘비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인생은 첫발자국도 잘 떼야 하지만 인생말년에나마 온갖 편견과 오해와 자기본위의 관념에서 단호히 벗어나 애국애족의 참된 길에 들어선다면 조국과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것이다.

진정 재북인사들의 묘비들은 통일애국의 길에서 마친 생이라면 과거불문의 원칙에서 력사와 민족과 더불어 그 이름을 영원히 빛내여주는 영생의 높은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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