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항 일 혁 명
(1)
4. 타향에서 타향으로
아버지가 활동거점을 자주 옮기였기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여러번 하여야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것은 다섯살 잡히던 해였다. 그해 봄에 우리는 봉화리로 이사를 갔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헤여지면서도 별로 서운한줄을 몰랐다. 아직 철이 덜 든 때여서 리별에 대한 생각보다도 새고장,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러나 중강으로 들어가던 그해 가을에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가 북쪽 한끝으로 이사를 간다니 집안식구들도 못내 서운해하였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지지해주고 뜻을 합쳐주던 할아버지도 아들, 손자들이 천리밖으로 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아연해하였다.
아버지는 리별을 앞두고 쓸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눅잦혀드리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토방우에서 할아버지의 일손을 마지막으로 도와드리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나는 요시찰인으로 등록되여 조선한복판에서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을 나올 때 놈들은 나보고 운동을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나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열번 다시 감옥에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겠습니다. 왜놈들은 독한놈들입니다. 독립만세나 불러서는 나라를 찾지 못합니다.》
우리가 중강으로 이사를 가던 날 큰삼촌은 아버지를 붙들고 먼데 가도 고향을 잊지 말고 오실 짬이 없으면 편지라도 자주 하라고 하면서 몹시 울었다.
아버지도 삼촌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오냐, 고향을 잊지 않으마. 내 이 고향을 어떻게 잊겠니. 우리가 세상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 헤여지지만 어느때든지 독립이 되면 한데 모여 재미있게 살게 되겠지. 네가 어릴 때부터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신삼이로 손이 다 부르텄는데 오늘은 또 너한테 큰 집안살림을 다 떠맡겨놓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형님, 그런 말은 말라요.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모실테니 아무쪼록 잘 싸워서 품었던 뜻을 꼭 이루시라요. 나는 여기서 그날만 기다리겠어요.》
그 작별모습을 보는 나도 북받치는 설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라가 독립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였지만 그런 날이 과연 언제이겠는지 그때로서는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사실 그때 고향을 하직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만경대에 와보지 못한채 낯설은 이국땅에 묻히였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헤여지기 싫어 자꾸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나서자란 산천을 떠나 먼 타향으로 자리를 옮기는것이 싫었지만 한가지만은 마음이 놓이였다. 중강에 가면 평양감옥에서 멀어지는것이 좋았다. 사실 아버지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후에도 나는 좀처럼 불안을 덜어버릴수 없었다. 왜놈들이 또 아버지를 감옥으로 붙잡아가지 않겠는가 하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던 그 시절에 나는 서울이나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가면 감옥도 없고 왜놈들의 꼴도 보지 않게 될것 같은 천진한 생각을 하였다.
평양에서 중강이 몇리인가고 물었더니 천리라고 하였다. 나는 천리라는 말에 마음을 푹 놓았다. 왜놈들이 그 먼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강은 조선에서 제일 추운 고장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만 안전하다면 추위 같은것은 얼마든지 참을수 있었다.
이사짐은 밥그릇에 숟가락 몇개를 꾸려넣은 어머니의 보퉁이와 아버지가 메고 가는 전대짐 하나가 전부였다. 봉화리로 갈적에는 궤짝도 있고 책상도 있고 놋그릇, 질그릇 따위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친구 한사람이 우리와 동행하였다.
우리는 신안주에서 기차를 내려 개천, 희천, 강계를 거쳐 중강까지 내내 걸어갔다. 강계쪽으로는 아직 철도가 놓이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는 길에 나서자 내가 먼길을 꽤 걸어가내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였다. 어머니도 내가 따라가지 못할가봐 조마조마해하는 눈치였다. 내 나이 여덟살밖에 안될 때였으니 부모에게 시름거리가 될만도 하였다.
나는 지나가는 달구지를 잠간씩 얻어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로정을 걸어갔다. 내 일생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커다란 육체적시련이였다.
강계에 도착한 우리는 남문밖에 있는 객주집에 들려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길을 떠났다. 객주집주인은 강계지방의 지하조직성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이해주었다. 강계에서 중강에 이르는 500리길은 령도 많고 무인지경도 많았다.
우리가 배낭령을 넘을 때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 세살 나는 철주를 업고 보퉁이를 인데다가 초신이 해지고 발까지 부르터서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중강에 도착한 나는 그만 실망하였다. 거기도 평양의 황금정이나 서문통처럼 일본사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조선사람들은 고향에서도 살수가 없어 이리저리 쫓겨다니는데 그자들은 이런 벽지에까지 쫓아와서 주인행세를 하고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곳이면 어디에나 일본사람들이 다 배겨있다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중강에는 경찰서도 있고 류치장도 있고 헌병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