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진로
  • 기타 |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제8권 중에서 -개선-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22-08-13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제8권 중에서

 

8. 개 선

 

주체34(1945)년 8월의 조선은 해방의 열파로 진동하였다.

삼천리를 뒤흔드는 감격의 열풍속에서 인민은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을 일일천추로 고대하고있었다.

민족의 령수를 낳은 고도 평양은 김일성장군님의 입성을 기다리느라고 밤에도 잠들줄 몰랐다. 주체14(1925)년에 설한풍을 헤치며 고향을 떠나신 김일성장군. 래일이면 오실가, 모레면 오실가. 그이를 기다리는 40만 평양시민의 간절한 마음 한결같았다.

서울에서는 려운형, 허헌, 홍명희를 비롯한 명망높은 인사들이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서울역전은 김일성장군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떨쳐나온 수천수만명의 시민들로 하여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3천만의 심장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실 그 순간을 향해 숨가쁘게 고동치고있었다.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는 소식이 훈련기지에 날아온 그 순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모두 흥분된 기분으로 조국에 돌아갈 차비를 하였습니다. 스무해동안이나 타향의 이슬비를 맞으며 살아온 나도 고향으로 한시바삐 돌아가고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귀국의 날도 얼마간 미루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개선을 학수고대하는 국내인민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우리도 모르는바가 아니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출발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조국에 돌아가더라도 준비를 더 잘해가지고 가자는것이 우리의 욕심이였습니다. 무슨 준비였는가. 새 조국 건설과 관련된 준비였습니다. 조국해방의 전략적과제가 완수된 조건에서 우리는 새 조국 건설과 관련된 시간표를 앞당기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1945년 9월 2일 도꾜만에 정박하고있던 미군전함 《미쑤리》호 함상에서는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국제적인 의식이 거행되였습니다. 그날 일본정부와 군부를 대표하여 외상 시게미쯔와 참모총장 우메즈가 항복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시게미쯔는 중국주재 일본공사로 있을 때 윤봉길렬사의 폭탄공격을 받고 외다리쟁이가 된 사람입니다. 우메즈도 일본군부의 명물이였습니다. 그는 1939년 가을부터 1944년 여름까지 관동군사령관을 하였습니다. 일본관동군이 존재한 전기간에 사령관을 여라문사람이 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두번째 사령관이였습니다. 적들이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내걸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대《토벌》소동을 벌린것이 바로 우메즈가 관동군사령관을 할 때입니다.

여러해동안이나 인류를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반파쑈력량의 승리로 종결되였습니다.

우리의 숙적이였던 바로 그 우메즈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패전의 슬픈 고배를 마실 때 우리는 항일혁명에서 승리하고 민족해방혁명의 새 력사를 창조한 주인공들이 되여 조국에 돌아올 차비를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공산주의사상의 발원지인 구라파와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최전방이였던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이 민주주의적인 기초우에서 새 사회를 건설할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았습니다.

국내의 형편도 좋았습니다.

조국이 해방되기 바쁘게 우리 나라 각지에서는 인민위원회들이 조직되였습니다. 국내당조직에 망라되였던 혁명가들과 항쟁조직성원들이 핵심이 되여 도처에서 당단체와 군중단체 조직들도 내왔습니다. 평양과 서울을 비롯한 국내의 주요도시들에는 해내외의 문예인들이 민족문화건설의 새로운 꿈을 안고 집결하였습니다. 로동자들은 무장자위대를 조직하고 공장, 기업소들과 탄광, 광산, 항만, 철도 등을 스스로 보위하였습니다. 전민항쟁을 통하여 발양되였던 우리 인민의 구국열은 해방과 함께 건국열로 전환되였습니다.

조선혁명의 당면과업의 견지에서 보나, 종국적인 목적달성의 견지에서 보나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정세는 매우 락관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패망하였지만 반혁명은 혁명에 대한 공세를 단념하지 않고있었습니다. 일본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후에도 일본군패잔병들은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과 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은 지하에서 새 조국 건설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하고있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들과 불순이색분자들, 정치적야심가들이 정체를 숨기고 당단체들과 인민정권기관들에 기여들었습니다.

우리는 원동에 있을 때 미군이 38선이남에 진주한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미국군대의 진주가 실현되면 우리 나라에는 두 대국의 군대가 동시에 진주하는것으로 됩니다. 전패국도 아닌 우리 나라 땅에 다른 나라 군대가 둘씩이나 와서 주둔하는것은 그 구실이나 명분여하에 관계없이 재미없는 일이였습니다.

갑오농민전쟁때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우리 나라에 군대를 출병시킨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은 그들의 덕을 조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량군의 출병은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나라 강산은 전란에 부대껴 황페화되였습니다.

쏘미 량군의 주둔으로 하여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장으로 될수 있었으며 그 배경밑에서 우리의 민족력량은 좌익과 우익으로, 애국과 매국으로 분렬될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있었습니다. 당쟁이 성행하고 당파와 외세가 결탁하면 그 종착점은 망국으로 되는 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새 조국 건설을 다그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먼저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야 했습니다.

우리 혁명의 주체란 우리 인민자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항일혁명의 직접적담당자인 인민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에 참가한 수십수백만에 달하는 항쟁대오는 즉흥적으로 전장에 뛰쳐나온 자연군중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해를 두고 가꾸어온 조직군중의 대오였습니다.

우리는 한사람을 혁명동지로 만들기 위해 100리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불속에도 뛰여들어갔습니다.

항일혁명의 전로정은 인민대중을 력사의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광복성전의 1선에 내세워준 사랑과 믿음의 력사이며 인민대중자신이 자기의 피와 땀으로써 당당한 력사의 주체임을 과시해온 위대한 투쟁과 창조의 력사입니다. 이 인민과 인민혁명군의 투사들이야말로 새 조국 건설을 담당하게 될 우리 혁명의 주체였습니다. 인민의 사랑과 지지속에서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여 투쟁할 때 그 어떤 준엄한 시련도 이겨낼수 있으며 그 어떤 어려운 투쟁속에서도 승리할수 있다는것은 우리가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찾아낸 귀중한 진리입니다.

나라가 해방되자 적지않은 사람들은 조국을 찾는 일이 어렵지 일단 찾은 다음에 새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건국이야말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항일혁명을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해낸것처럼 우리는 새 조국 건설도 조선사람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하였습니다. 건당, 건국, 건군은 물론, 민족경제와 민족교육,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를 우리 인민자신의 힘으로 개척해나가자는것이 바로 우리의 결심이였습니다. 인민을 새 조국 건설에 불러일으키자면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하고 동원할수 있는 혁명의 참모부가 있어야 하고 정권이 있어야 하고 새 사회 건설을 무력으로 담보할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1945년 8월 20일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과업으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3대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토의하고 필요한 조직사업도 하였습니다.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제 수행을 위한 소조들도 조직하고 파견지도 확정하였습니다. 강건, 박락권, 최광, 임철, 김만익, 공정수 등은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국으로 떠나기전에 소조성원들을 위한 강습을 여러날에 걸쳐 조직하였습니다. 강습에서는 파견지에 가서 수행해야 할 사업내용과 사업방법으로부터 각 지방 풍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들을 취급하였습니다. 강의는 나와 김책, 안길 등이 담당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강습이 끝나자 조국으로 빨리 떠나자고 졸랐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다 조국에 돌아갈 날을 그리며 동심과 같은 심경에 잠겨있었습니다.

우리는 귀국할 때 아이가 달린 녀대원들은 후에 귀국시키기로 하고 훈련기지에 떨궈두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쏘련군대와의 련합작전계획에 따라 부대별로 제가끔 지정된 계선을 차지하고 전투행동에 진입하다가 불시에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했기때문입니다.

국내각지에 락하산으로 출전하기 위하여 훈련기지에서 대기하고있던 부대는 하바롭스크, 목단강, 왕청, 도문을 거쳐 륙로로 조국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으로 하여 도중에 그 계획을 포기하고 로정을 변경시켜 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때 관동군패잔병들은 목단강 남쪽에 있는 차굴을 폭파하였습니다. 적들이 우회도로와 잇닿은 교량들과 목단강비행장의 활주로까지 파괴해놓았기때문에 우리는 자동차도 기차도 비행기도 다 리용할수 없는 형편이였습니다. 그래서 목단강까지 갔다가 원동으로 되돌아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군함을 타고 귀국의 길에 올랐습니다.

쏘련 제1원동전선군사령부의 한 대좌가 나를 호위하여 동행하였습니다.

함장은 나를 보고 중속으로 달려도 하루밤 하루낮정도면 원산항에 배를 댈수 있다고 장담하였습니다.

우리가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난 날은 파도가 심했습니다. 배의 량켠에 집채같은 파도가 솟아올라 갑판을 후려갈기군하였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였습니다.

대부분이 바다에서 배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여서 멀미때문에 단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배에서 하루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에는 바다가 잔잔했습니다.

배전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볼 때 이상스럽게 가슴이 뛰던 일을 좀처럼 잊을수 없습니다.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열네살때 건느던 압록강이 떠올랐습니다. 망국의 한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그 압록강과 조국의 일만강들이 해방열에 모조리 녹아 이 바다를 펼쳐놓은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혈육들과 친지들, 동지들을 이국의 고혼으로 남겨두고 스무해만에 조국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참으로 말이나 글로써는 다 설명할수 없는 일희일비의 심정이였습니다.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한것은 1945년 9월 19일이였습니다.

그때 부두에서 우리를 마중해준것은 원산시에 주둔하고있던 쏘련군사령부 성원들이였습니다.

그날 부두에 나온 조선사람들가운데서 기억나는 인물은 그 당시 쏘련군대에서 군관으로 복무하고있던 한일무입니다. 그가 강원도당위원장을 한것은 그후의 일입니다.

쏘련군측이 우리의 움직임을 비밀에 붙였기때문에 부두에는 환영군중이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후날 허헌, 홍명희, 려운형을 비롯하여 우리의 개선을 전렬에서 기다리고있던 국내의 명망높은 인사들은 우리가 원산항에 상륙했을 때 부두에 환영군중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리 선통이라도 할것이지 행차를 그런 식으로 슬그머니 하면 백성들 체면이 어떻게 되는가고 하면서 섭섭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의 리주하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허헌의 말이 우리 귀국일정이 사전에 공개되였더라면 서울역에 나와서 매일같이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물론, 서울시민의 과반수가 도보와 기차로 원산땅에 쓸어들었을것이라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야단스러운 환영을 조금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투사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수천수만날 전장과 교수대에서 바친 피와 로고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조국땅에 들어서자마자 조선인민혁명군이 개선했다는 소문을 내지 않고 인민들속에 조용히 들어가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기초작업이나 해놓고 조국의 인민들에게 인사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원산에 도착한후 지방당일군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민들속으로 빨리 들어가야 하겠다는것을 다시한번 통감하였습니다.

나는 원산에 상륙한 날 적지 않은 사람들과 담화를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에 가서 당일군들과도 담화하고 동양려관에서 로동조합대표를 비롯한 지방유지들과도 담화하였습니다. 그중 많은 품을 들인것은 리주하와의 담화였습니다.

원산사람들과 담화를 하고나서 내가 받은 총적인 인상은 국내의 어느 당파나 어느 조직도 인민들에게 똑똑한 건국로선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는것이였습니다.

원산시당의 어떤 일군들은 쏘베트를 꿈꾸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진로에 대한 문제가 화제로 되자 사회주의혁명을 당장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원산시당청사 벽에 걸려있는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는 구호에도 그대로 반영되여있었습니다.

나는 그 구호를 보고나서 시당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로동계급의 힘만으로 새 조국 건설을 하려 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야 공산혁명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인데 로동계급밖에 믿을것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1920년대 후기 우리가 종종 만나보군하던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한것이였습니다. 스무해가 지나 해방된 조국땅에서 그런 목소리를 다시금 듣게 되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견이나 주의주장에서는 특별한 진보도 없었고 새로운 시국의 흐름에 발을 맞추려는 진지한 모대김도 별로 없었습니다.

나는 원산시당일군들에게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고 한 시당청사의 구호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안고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것만큼 민주주의기발아래 단결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땅에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로동계급뿐아니라 그 동맹자인 농민은 물론, 새 사회 건설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군중을 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거족적인 힘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원산시당사람들과의 담화는 저녁식사전에도 하고 후에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바람에 나는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날수 없었습니다.

나를 수행해서 서철이와 함께 시당에 따라갔던 김익현은 나에게 다가와서 자정이 다됐다면서 산에서도 노상 밤을 밝혔는데 해방된 조국에 와서까지 밤을 패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익현에게 나라는 해방됐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출발진지에 서있다는것을 명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원산시당일군들과의 담화는 귀국후 내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내인사들에게 건국로선의 륜곽을 그려보인 조국에서의 첫 대화였습니다. 나는 그날 우리 나라에 세워질 정권형태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는 주장도 공개하였습니다.

리주하를 비롯한 원산시당일군들, 원산의 유지들을 만나보고나서 나는 우리가 8.15해방후 즉시 건당, 건국, 건군의 3대과업을 내용으로 하는 새 조선 건설의 리정표를 작성하고 그것을 마련한 기초우에서 조국행을 한것과 조국에 발을 들여놓는 그길로 지정된 파견지로 떠나갈 결심을 한것이 천만번 정당하였다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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