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제 5 장 무장한 인민
5. 새 무장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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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32년 4월하순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최종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입대지망자들에 대한 마지막심사와 함께 유격대결성식날자와 장소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였으며 당면한 활동지역을 확정하고 유격대의 활동과 관련된 전반적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회의후 입대지망자들은 3도백하의 입구인 류가분방(발재툰)에 모였다가 소사하에 집결하였다. 입대지망자는 100여명이였는데 그들중 지금까지 이름이 기억되는것은 차광수, 박훈, 김일룡(소사하), 조덕화(소사하), 곰보(별명, 소사하), 조명화(소사하), 리명수(소사하), 김철(김철희, 흥륭촌), 김봉구(흥륭촌), 리영배(흥륭촌), 곽ㅇㅇ(흥륭촌), 리봉구(삼인방), 방인현(삼인방), 김종환, 리학용(국내), 김동진(국내), 박명손(연길), 안태범(연길), 한창훈(남만)밖에 없다.
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였다.
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휴대한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고 그 공지의 한쪽변두리에 소사하와 흥륭촌일대의 인민들이 모여서서 술렁대고있었다.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만국로동계급의 전투적명절인 5월 1일 우리 반일인민유격대는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일룡이 이날의 행진에서 노래선창을 담당하였다.
그날은 시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장교들과 병사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
무력시위를 끝낸 대오가 토기점골로 돌아왔을 때 차광수와 김일룡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 몸져누워있는 어머니를 데려왔다.
병고에 시달린 얼굴, 미간에 생긴 주름살, 머리의 흰오리,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고요히 웃고있었다. 어머니는 리영배의 곁에 다가와 총이며 탄띠며 오각별을 오래오래 만져보았다. 그 다음 김철, 조덕화, 김일룡, 방인현, 차광수의 앞을 거닐면서 이 총도 쓸어보고 저 총도 쓸어보고 이 어깨도 만져보고 저 어깨도 만져보고.
미구에 어머니의 눈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이제는 됐다.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
음성도 퍼그나 젖어있었다. 어머니는 분명 우리에게 바친 자신의 지성은 까마득하게 잊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먼저 떠나간 아버지와 애국지사들의 로고에 대하여 생각하였을것이다.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북만과 남만에서도 유격부대들이 련이어 태여나 적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1932년 봄은 항일대전의 총성속에서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