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장
  • 기사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올리는 이유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23-06-0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올리는 이유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500만명의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로서 행정 서류를 통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핵심전범인 아이히만이 1961년 법정에서 한 말이다.

당시 <뉴요커>라는 미국잡지의 요청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작을 통해 이것을 ‘악의 평범성’으로 묘사하며 홀로코스트의 인종학살에 가담했던 아이히만을 악마적 본성을 지닌 흉포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관료로 묘사했다.

과연 아이히만이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관례를 따른 ‘명령수행자’,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는가.

아니다. 그는 자기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가를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학살을 능동적으로, 효과적으로, 또 목적의식적으로 수행했다. 단지 자신을 나치 지배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법과 질서에 충실해야만 하는, 또 스스로 충실했던 선량한 공무원처럼 행세하며 법정을 기만했을 뿐이다.

하다면 이런 아이히만과 같은 자들이 이 사회에는 없는가.

이미 이 땅에는 사상 초유의 검찰독재 정권이 태어났다.

윤석열은 권력·사정 기관을 비롯해 국정 전반에 걸쳐 검찰 출신들을 요직에 배치했고, 검찰 권한을 다시 키워 윤석열식 독재통치의 핵심 기관으로 전면에 내세웠으며 자기에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을 생성해내고 있다.

구조적 악은 수많은 해악을 키우기 마련이다.

노동대중 일반에게 있어서 이런 악에 순응한다는 것은 수많은 고통과 불행을 감수해야 하고 초보적인 자유와 삶의 선택권까지도 말짱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순응에 거부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빨갱이’, ‘종북’, ‘좌익 용공 세력’ 등으로 몰려 가차없이 탄압 당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정치인, 노동자, 시민단체, 언론사 가림없이 전방위적으로 살인적인 마녀사냥이 펼쳐지고 있으며 민주민권이 여지없이 말살당하고 있다.

군사파쇼독재 정권시기를 무색케 하는 서슬푸른 칼날 밑에서 끝끝내 양회동 노동자가 자신의 온몸에 의분의 불을 달아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경찰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적극적 법 집행으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본인의 신청이 없더라도 적극 행정 면책심사위원회를 개최하겠다적극 행정으로 결정되면 징계 요구 없이 즉시 면책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징계 안할 테니까 집회·시위를 가차없이 진압하라’는 살인명령을 내린 것이다.

동시에 국힘의힘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살수차(물대포) 재도입을 여론화하고,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불법파업 조장법’으로 몰아가며 “공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힘”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윤석열 독재정권의 노동탄압을 극구 비호두둔해 나서고 있다.

이런 아이히만들이 ‘법’과 ‘질서’를 운운하며 윤석열의 앞잡이, 폭정의 집행관이 되어 곳곳에서 노동대중을 아예 절멸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다.

허나 역사와 민중은 정의와 진리를 짓밟고 인륜에 불복하는 이런 자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았다.

1962년 5월 31일 자기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지고 법정 판결에 따라 사형된 아이히만이 그러했고, 국민적 저주와 규탄 속에 무덤에 들어간 5.18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바로 그러했다.

윤석열 폭군의 수족이 되어 노동대중을 짓누르는 이 땅의 아이히만들도 검찰독재 정권의 종말과 함께 역사의 엄정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링크드인으로 보내기 구글로 보내기 레디트로 보내기 카카오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