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참다운 문학예술을 지향하여
해방후 새 사회건설에서는 진보적이며 인민적인 문학예술을 새롭게 창조하여야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악독한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짓밟혔던 민족문화를 일으켜세워 민주조선의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해야 하였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창조된 혁명적문학예술의 고귀한 전통이 있으며 제반 민주개혁이 완전히 실시된 북조선에는 새로운 민족문화를 무한히 발전시킬수 있는 사회제도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 문학예술발전의 방향은 명백히 조선인민앞에 제기된 력사적인 민주과업을 훌륭히 실현하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고무추동하고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인민적인 문화를 창조하는것으로 되여야 하였다.
그런데 이 아름찬 과업을 맡아 수행할수 있는 작가, 예술인력량이 준비되여있지 못하였다. 관현악단도 없었고 악기도 변변한것이 없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흩어져있는 작가, 예술인들을 다 모이게 하여 민족문화건설을 떠밀고나가야 할 담당자대렬부터 꾸려놓아야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34(1945)년 10월 22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선전부장과 하신 담화 《예술단체들을 조직할데 대하여》에서 해방전에 문학예술활동을 하던 사람들중에는 일제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족적량심을 버리지 않고 사실주의적인 문학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애써온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작가, 예술인들이 적지 않다고, 이러한 사람들은 북조선에도 있고 남조선에도 있으며 해외에도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작가, 예술인들을 모두 찾아 집결시키며 그들의 역할을 높여 우리의 문학예술을 개화발전시키기 위한 제반 사업을 추진시켜나가야 할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건당, 건군, 건국의 모든 사업을 령도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작가, 예술인들을 한사람한사람 찾아내시고 그들을 새 민주조선건설의 길로 이끌어주시여 북조선에서는 북조선예술총련맹이 결성되였다.
북조선예술총련맹의 창립은 북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은 물론 남조선의 진보적인 작가, 예술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과 고무를 주었다. 그들속에서는 북조선으로 들어와 자기들의 재능과 열정을 꽃피우려는 열망이 높아졌다.
그런데 북조선에서의 민주건설과 새로운 민족문화건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극소수의 반동분자들은 남조선에서 진보적작가들이 북조선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음으로 양으로 방해해나섰다.
이러한 실태를 꿰뚫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4월 30일 일군들에게 남조선에서 진보적작가들이 북반부에로 들어오겠다는것을 어느 누구도 막을 사람은 없으며 또 막을 권리도 없다고 하시면서 진보적이며 선진적인 작가들이 우리를 찾아오려는것은 응당한 일이며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찾아오면 환영할것이며 그들과 손을 맞잡고 부강한 민주주의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크나큰 믿음에 떠받들려 남조선의 진보적인 작가들은 1946년 여름 미《군정》과 그 주구들의 탄압과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38°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들어왔다.
민주주의기발아래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일념으로 북조선에 들어온 문학예술인들중에는 시인 박세영선생도 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으로 사업. 《애국가》(1947년), 《빛나는 조국》(1947년), 《승리의 5월》(1947년) 등 가사작품들과 서사시 《밀림의 력사》(1962년) 등 많은 시작품들을 창작, 작품집으로 시집 《승리의 나팔》(1953년), 《박세영시선집》(1956년), 《박세영동시선집》(1962년) 등이 있음.
박세영선생은 1924년부터 진보적문학단체인 《염군사》의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맹하여 프로레타리아시인으로 활동하였다. 《해빈의 처녀》 등 시편들을 창작한 그는 1926년말부터 프로레타리아아동잡지 《별나라》의 편집을 맡아하면서 아동문학작품들도 창작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별나라》가 페간되고 진보적문학창작의 길이 막히게 되자 박세영선생은 중학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시집 《산제비》를 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6월말의 어느날 남조선에서 들어온 박세영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지난 시기 겪은 일들과 생활형편을 알아보신데 이어 해방된 우리 나라에 민족문화를 빨리 건설해야 하겠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손으로 꼽을 정도의 작가, 예술인들밖에 없다고, 그러기에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당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말씀하시였다.
그가 민족문화건설에 적은 힘이나마 바쳐 투쟁할것을 굳게 결의다지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우 만족해하시며 앞으로 일을 하려면 우선 마음이 안정돼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족들도 속히 오도록 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해 10월초 박세영선생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가족들을 남조선에서 데려오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서재가 있는 주택과 쌀 열가마니씩 안겨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박세영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품에 안겨 재생의 기쁨과 작가로서의 참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민주주의적민족문화건설에 자기의 모든 열정과 지혜를 다 바쳤다. 그 길에서 그는 《애국가》, 《빛나는 조국》, 《승리의 5월》 등 많은 가사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가 창작한 많은 작품들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애국가》이다. 이 작품은 위대한 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수령님의 두리에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조선인민의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끝없이 번영할 내 조국을 영원히 빛내여가려는 우리 인민의 드팀없는 의지를 품위있게 반영한 송가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8월 어느날 한 일군을 부르시여 애국가를 창작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면서 애국가에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날로부터 한달도 못되던 어느날 또다시 애국가창작을 다그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 수령님께서는 9월말에는 작가들을 부르시여 애국가를 빨리 창작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가들속에서 애국가창작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도록 하시는 한편 이 사업을 하나의 거대한 애국운동으로 전환시키실 구상을 지니시고 애국가창작사업에 온 나라 전체 인민이 달라붙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애국가창작사업이 군중적으로 벌어졌는데 전국의 작가, 시인들과 근로자들은 애국가의 가사를 무려 800여편이나 창작하여 보내왔다.
해당 부문에서 이 작품들을 엄정하게 심사하였는데 그 결과 1947년 5월 초순에 박세영선생이 창작한 가사가 새 애국가의 가사원안으로 선정되였다.
애국가의 후보작품으로 선정된 가사는 곧 작곡에 붙여져 많은 곡이 창작되였는데 그 곡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두곡이 애국가의 후보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그리하여 이 두곡가운데서 어느 한곡을 가사와 함께 애국가의 곡으로 확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애국가의 가사와 곡을 최종적으로 심의하는 이 책임적이고도 보람찬 사업을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주체36(1947)년 6월 2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애국가시청회가 진행되였다.
애국가의 후보작품으로 선정된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두곡이 연주되였다.
노래를 주의깊게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번째 노래와 두번째 노래를 다시 들어보시고나서 두곡이 다 좋다고 하시면서 먼저 들은 곡의 선률이 장중한 맛이 있고 무게가 있으니 이것을 《애국가》로 하고 뒤에 들은 곡은 제목을 고쳐 그대로 부르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가고 물으시고 노래를 지은 시인과 작곡가를 치하하시면서 가사를 쓴 박세영선생을 가까이 부르시여 자신의 옆에 앉게 하신 다음 가사 한구절한구절을 짚어가시며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가》에서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시행부터 그아래는 반복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력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번만 부를수 있겠는가, 그것은 너무도 단조로우니 다시한번 부르면 선률로 보아서도 더 효과적이고 음악상조화도 잘될뿐만아니라 노래도 한결 장중해지고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긍지감과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따라 시청회에서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이란 시행부터 그아래를 반복하면서 노래를 한번 더 불렀다. 그랬더니 노래가 한결 장중해져서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으로서의 높은 민족적긍지감과 자부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조선을 길이길이 받들어나갈 숭고한 애국적감정이 가슴속에 더욱 세차게 솟구쳐오르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세상에 태여난 애국가의 선률을 들으며 박세영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예지와 탁월한 령도, 자애로운 사랑을 다시한번 심장깊이 느끼였으며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님께 충심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였다.
박세영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면서 《숲속의 사수임명식》, 《나팔수》를 비롯한 전투적인 시들을 내놓았다. 그후에도 그는 왕성한 창작적열정을 가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적현실을 폭넓게 일반화한 서사시 《밀림의 력사》, 변모되는 조국의 현실을 참신한 서정으로 노래한 시초 《광복거리에서 부르는 노래》 등 많은 시작품들을 내놓았다.
박세영선생은 암흑의 땅 남조선에서 해빛을 따라 북으로 들어왔기에 자기의 창작적재능과 열정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었으며 나라와 민족이 사랑하고 노래하는 수많은 시와 가사작품들을 창작하고 조선민족문단에 자기의 이름을 떳떳이 새겨놓을수 있었다.
박세영선생과 한날한시에 북으로 들어온 소설가이며 극작가였던 송영선생도 마찬가지이다.
송영(1903. 5. 24-1977. 1. 3) 소설가, 극작가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으로 사업. 희곡 《자매》(1949년), 《나란히 선 두집》(1949년), 풍자극 《금산군수》(1949년), 답사기행문집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1956년), 희곡 《불사조》(1959년) 등을 창작. 전후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으로 사업.
어려서부터 문학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던 송영선생은 희곡 《백양화》, 소설 《어두운 마을》을 잡지에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진보적인 작가들과 함께 프로레타리아문예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하고 1925년 《카프》조직에 참가하였다. 그는 《카프》사건으로 두차례에 걸쳐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로동자, 도시빈민들을 비롯한 무산대중의 비참한 생활과 운명, 생존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반영한 작품들을 쓴 송영선생은 본의아니게 일제가 조작한 친일단체의 《리사》로 되게 되였다.
당시 패망을 앞둔 일제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징병》과 《징용》에 마구 끌어가는 한편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작하고 여기에 적지 않은 연극인들과 함께 송영선생도 강압적으로 망라시켰던것이다.
본의는 아니였다 해도 일제에게 굴복하였다는 치욕감속에 고달픔과 괴로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해방직후 적지 않은 작가, 예술인들이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땅을 떠나 자기들의 재능을 꽃피울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북행길에 오를 때에도 선뜻 따라서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하던 그에게도 재생의 해빛이 따사로이 비쳐왔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그를 평양으로 불러주신것이다.
(온 민족이 태양으로 우러러받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나같은 사람까지 불러주시다니?!…)
그러나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앞에서 송영선생은 진정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민족적량심을 간직하고있는 사람이라면 과거경력을 묻지 않고 누구나 한품에 안아주시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시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게 되였다.
그 태양의 빛발을 따라가자, 그래야 지난날의 오점을 씻고 참된 인간으로 살수 있다!
이렇게 재생의 해빛을 받아안은 송영선생은 단호히 북행길에 올랐다.
그가 가는 북행길, 그것은 욕된 경력에 대한 위구와 불안을 털어버리고 만시름을 놓고 안길수 있는 넓고 따사로운 사랑의 품으로 찾아가는 행복의 길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의 애국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북반부로 들어오자 북조선연극인동맹의 책임적인 직무도 맡겨주시였으며 서울에 있던 그의 부모들과 가족들까지 평양으로 데려오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가장집물이 다 갖추어진 새 주택에 쌀과 여러가지 부식물도 보내주시는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송영선생은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되여가고있는 북반부의 현실을 세상에 대고 높이 자랑하고싶은 창작적흥분을 안고 붓을 달렸다. 그리하여 두편의 희곡 《인민은 조국을 지킨다》와 《나란히 선 두집》이 창작발표되였는데 그것은 8.15경축 문예경연에서 입선작품으로 평가되였으며 책으로도 출판되고 무대에서도 공연되였다.
송영선생은 처녀작을 써내고도 그것을 실은 잡지의 발매를 금지당해야 했던 가슴저린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마음껏 창작의 나래를 펴도록 따뜻이 보살펴주는 어머니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정으로 눈굽을 적시였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종군작가로 활동하면서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 등을 써서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을 전쟁승리에로 고무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송영선생의 창작적열정과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여 주체42(1953)년 9∼12월에 그를 항일혁명투쟁전적지조사단에 망라시켜주시였으며 그가 1956년 9월에 창작한 장막희곡 《애국자》가 완성되여 무대에 올랐을 때에는 몸소 보아주시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많은 근로자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좋겠다고, 또 출판물과 방송을 통하여 널리 보급선전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이처럼 재생의 활력을 안겨주시고 재능을 활짝 꽃피워주시는 크나큰 사랑의 품에 안겼기에 송영선생은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창작에 힘을 기울일수 있었다.
남조선에서 고뇌에 찬 나날을 보내다가 행복과 영광의 절정에 오른 송영선생의 운명은 비록 한때 본의아니게 잘못된 길을 걸었다 해도 그것을 뉘우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깨끗한 량심으로 성실하게 살아갈 때 그 인생은 빛난다는것, 이 량심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해주고 삶을 최상의 높이에서 빛내여주시는 품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의 품, 어머니조국의 품이라는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있다.
오랜 연극배우, 연극연출가였던 황철선생도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활짝 꽃피운 예술인들중의 한사람이다.
일찍부터 연극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던 황철선생이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모진 고초끝에 극단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그에게 차례진것은 식민지배우의 쓰라린 고통과 설음뿐이였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한 진정한 예술활동을 벌려나가려는 그의 희망은 해방을 맞아 다시금 부풀어올랐으나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첫날부터 민족문화를 가혹하게 말살하면서 진보적인 문예인들의 애국적예술활동을 무참히 탄압하였다. 진보적인 예술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막이 오른 무대우로 폭발물이 날아들기도 하였다.
(아, 언제면 광명한 무대우에서 새 조선의 연극을 마음껏 공연해볼것인가!)
이런 모대김속에 몸부림치던 그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여 투쟁하는데로 무대를 옮겼다.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에 나선 그에게도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이 전해져왔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여 민족의 은혜로운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풍모에 완전히 매혹되고 국립영화촬영소를 비롯한 문화예술기관들을 돌아보며 북반부예술인들의 자유롭고도 행복한 예술창조활동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황철선생은 회의가 끝난 후 자주적인 인민의 나라로 일떠서는 북조선에 남아 새 사회, 새 문화창조의 대하에 뛰여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지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황철동무의 소원이 그렇다면 그대로 들어줍시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예술창조사업을 하고싶다고 하는데 이것을 막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 동무는 지금 서울에 나가도 무대에 출연할수 없습니다. 올해 서른일곱살이면 이제부터 한창 연기를 할 나이인데 여기에 그냥 남도록 하여줍시다. 그리고 황철동무가 안착해서 연기생활을 할수 있게 서울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빨리 평양에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황철선생의 가슴은 지난날 식민지예술인으로서 굴욕의 연기생활을 하여온 이름없는 배우를 한품에 안아주시고 민족적량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깊이 품고있는 그 간절한 소망을 헤아려주시며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은정에 보답할 일념으로 불탔다.
이렇게 북반부에 남은 황철선생은 그처럼 소원하던 연극활동을 마음껏 펼쳐나갈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위문공연의 길을 이어가던 황철선생은 어느날 미제의 야수적폭격에 의해 한팔을 잃게 되였다.
생명이 경각에 이른 그가 의식을 잃은채 누워있던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보고받으시고 한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황철동무가 중상을 당했다는것이 사실이요?》
오른팔이 파편에 잘리웠다는 그 일군의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출혈을 많이 했겠다고 걱정하시며 어쨌든 황철동무는 꼭 살려야 한다고, 빨리 치료대책을 세워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 동무를 자동차로 빨리 서울에 후송하라고, 거기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자동차는 자신께서 직접 말해놓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전쟁의 승리를 떠나서는 다른 무엇도 생각할 여유가 없는 때에 한 배우의 생명을 위하여 포연서린 전선길로 사랑의 자동차가 달리였다.
그가 소생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놈들이 비록 황철동무에게서 한팔을 빼앗아갔지만 그는 억세게 살아있다고 하시면서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도 본인의 요구대로 그를 다시 무대에 나서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에게 전과 같이 계속 연기를 할수 있게 의수를 잘해주어야 한다고 하시며 유능한 외과의사의 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였다.
황철선생은 이런 위대한 어버이사랑에 받들려 인간으로서만이 아니라 배우로, 무대예술인으로 다시 소생할수 있었다.
황철선생은 불구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전후에도 무대에서 내리지 않았으며 배우생활의 전성기를 펼쳐갔다. 또한 국립연극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의 직책에서 사업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출연하는 연극들을 보아주시면서 대본으로부터 연기형상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극창조사업을 세심하게 지도해주시였으며 그가 연기창조에서 성과를 거둘 때마다 못내 기뻐하시면서 보다 큰 성공에로 떠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화국의 첫 공훈배우, 첫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게 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인민들의 존경과 믿음, 사랑을 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철선생이 불치의 병으로 사경에 처했을 때에는 그를 어떻게 하나 살려야 한다고, 그 동무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낄것이 없으니 약도 제일 좋은것을 쓰고 정성을 다해서 그를 꼭 살려내야 한다고 하시며 그의 병치료를 위해 하루에도 몇차례씩이나 전화를 걸어주시였다.
그가 끝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죽지 말아야 할 동무가 죽었다고, 참 훌륭한 동무였다고,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몹시 애석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신문에 부고도 내고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도록 하시고 그의 자녀들을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여 공부시키며 유가족들을 잘 돌봐주도록 뜨거운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지나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 나라에서는 황철선생을 그 수훈자의 대오에 나란히 세워주었다.
참으로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있었기에 북조선으로 들어온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은 문예인으로서의 참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주체적인 민족문화건설에 자기의 모든 열정과 지혜를 다 바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