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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1)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합시다》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13-02-07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합시다》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군정》을 실시하고 주인행세를 하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을 억제하였으며 전체 조선인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하에 남조선에서 기어이 반동적인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괴뢰정부를 조작하려 획책하고있었다. 그로 하여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방을 맞은 조국땅은 북과 남으로 갈라질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사상과 정견이 서로 다른 북과 남의 애국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구원할 방도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론의하고 일치한 견해로 통일방책을 세웠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진행된 이 남북련석회의에 남조선에서는 리승만, 김성수와 같은 민족반역자들을 내놓고는 모든 애국적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다 참가하였다. 지난날 북을 반대하였던 우익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까지 참가하였다.

남북련석회의는 정견을 달리하는 각 당, 각 파, 각계각층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서는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고 미제의 책동을 짓부시고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조선사람의 힘으로 개척해나갈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남북련석회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행로에 새로운 리정표를 세웠다. 애국을 찾아 방황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들의 소망을 성취하였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들어왔던 당대의 한다하는 남조선의 정계인사들이 서울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평양에 남을 의향을 표시하였던것이다.

당시 민주독립당 당수의 신분으로 회의에 참가하였던 홍명희선생도 서울에 돌아가지 않고 평양에 삶의 닻을 내릴 결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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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1888. 7. 3-1968. 3. 5) 국가활동가

남조선에서 민주독립당 당수로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 주체37(1948)년 9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으로 사업. 주체50(1961)년 5월부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주체51(1962)년 10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저서로는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이 있음. 조국통일상수상자.

 

홍명희선생은 해방전 애국계몽사업에도 나서보았고 민족주의운동에 동조하여 상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고달픈 먼길도 걸어보았다. 또한 새로운 시대사상에 기대를 걸고 《신간회》의 발족에도 참여하였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가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도 굴함없이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지켜낼수 있은것이나 해방직후 《김일장군환영준비위원회》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그리고 서울의 혼잡된 정국에서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그 당수로 나서기도 했던것은 해방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민족의 령도자로 신뢰하였기때문이였다.

주체37(1948)년 5월 6일은 홍명희선생이 자기 운명의 새로운 리정표를 세운 뜻깊은 날이다.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고 회의에 참가한 그를 회의장 휴계실에서 잠간 만나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날 시간을 내여 그를 만나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 그가 일제의 학정밑에서도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켜낸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산에서 일제와 싸울 때부터 국내에서 선생처럼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워온분들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품고있습니다. 왜정세월에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낸다는것은 누구나 다할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산에서 일제와 직접 싸워온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하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시고는 그가 해방후에도 미국놈들의 회유와 기만책동을 물리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각계 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활약한 애국적소행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으며 고무적인 힘을 얻으셨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홍명희선생은 당시 남조선에서 민심의 폭발이였던 그 일을 두고 자신의 공적으로 평가받는것만 같아 몸둘바를 몰라하며 북조선에 들어와 여러곳을 돌아보며 느낀 소감을 말씀드리였다.

사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던 많은 남조선대표들은 북조선이 발전하였으리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그렇게까지 발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었다. 제반 민주개혁들이 실시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후과가 청산되고 진정한 민주주의제도가 세워져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들이 사회정치생활에 자유롭게 참가하고있었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공장, 기업소들이 복구확장되여 민족경제가 계획적으로 발전하고있었으며 농업생산도 해마다 장성되고 곳곳에 학교들이 세워져 랑랑한 글소리 높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조선은 민주주의길로 힘차게 나아가고있었다.

하기에 북반부의 이러한 약동하는 현실을 본 남조선대표들은 누구나 북조선이야말로 민주주의길로 확신성있게 나아가는 민주국가라고 찬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남조선대표들이 돌아가고있다고, 오래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론의하고 같이 손잡고 싸울것을 결의다진분들과 헤여지자니 섭섭한감을 금할수 없다고, 미제와 반동들이 활개치는 남조선으로 대표들이 돌아가는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홍명희선생은 어떻게 할 의향인가고 물으시였다.

조선사람을 위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치를 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의  산물인  북반부의 약동하는 현실을 대하면서  오직 그이께서 이끄시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참다운 길이라는것을 확신하고있던 홍명희선생이였다. 그래서 그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좋은 세상을 동경하여 태평성대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런 세상이 북조선에 펼쳐지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올려 북조선은 흥하는 집안 같고 남조선은 망하는 집안 같습니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전 남으로 나가지 않고 북조선에 남아 일하고싶습니다.》

그의 소망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선생께서 북조선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잘 생각하였다고, 김구나 김규식 같은분들은 여기에 남아있고싶어도 적들이 악선전을 할가봐 부득이 남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선생의 경우는 그분들의 경우와 다르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제는 년세도 많으시고 또 여기에 계셔도 할 일이 많다고 하시면서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합시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홍명희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과 통일을 위한 길에서 애국의 열정을 다 바치도록 사업과 생활을 일일이 보살펴주시였다.

홍명희선생이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치기까지의 20년동안에는 건국의 기초를 다져나가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조국의 운명을 수호하는 준엄한 전쟁도 있었으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벅찬 년대들도 있었다.

이 모든 시기에 투쟁속에서 단련된 혁명가도 아니며 풍상고초속에서 세련된 정치인도 아닌 홍명희선생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길을 드팀없고 보람있게 걸어올수 있었던것은 애국의 길에서 한번 손을 잡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믿고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의리로 빛나는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공화국이 창건되여 새 정부를 구성할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에게 내각부수상의 책임적인 직책을 서슴없이 맡겨주시였으며 자신의 집무실곁에 그의 사무실을 정해주시였다.

내각부수상, 이것은 나이가 적지 않은 홍명희선생에게 있어서 결코 감당하기 쉬운 직책이 아니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겠다는 애국적각오와 견결한 투지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수 있다는 고귀한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신심과 용기도 안겨주시며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의 정책으로부터 민족문화건설에서 나서는 크고작은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세세히 알려주시고 현지지도를 떠나시는 승용차안에서도,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는 비행기안에서도 사업에 필요한 모든것을 가르쳐주시였으며 멀리 떨어져 계실 때에는 친필로 편지를 보내여 큰 과업을 맡겨주기도 하시였다. 그리고 일부 편협한자들이 홍명희선생이 수령님의 집무실에 너무 자주 출입한다고 시비할 때에도 부수상이 수상을 만나는데 잘못된것이 무엇이 있는가, 앞으로도 일이 있으면 자주 찾아오라고, 그것이 자신의 사업을 돕는 일이라고 하시며 그를 고무격려해주기도 하시였다.

홍명희선생을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남달리 뜨거우시였다. 그의 생일 60돐상에 깃든 이야기는 오늘도 위대한 사랑의 전설로 전해져오고있다.

주체37(1948)년 7월 어느날 홍명희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의 저택으로 가게 되였다. 자기를 왜 부르셨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오늘이 바로 선생님의 생일 60돐날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찾았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홍명희선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생일에 대한 생각을 감감 잊고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던 그는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에는 훌륭한 생일상과 함께 항일투사들을 비롯한 여러 일군들이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더우기 생일상에 깃든 사연을 알고 그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하였다.

홍명희선생의 생일 60돐을 앞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녁식사를 하시다가 김정숙어머님께 남조선에 가족을 둔 홍명희선생의 생일 60돐상을 차려주어야 하겠다고, 그런데 그곳 음식법을 잘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하시며 저으기 걱정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계시던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그 일은 자신께서 맡아하겠다고 말씀올리시였다.

김정숙어머님의 말씀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럼 우리가 생일상을 잘 차려 혼자 생활하는 선생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하시였다.

그후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이 사는 남쪽고장의 음식을 만드는 법을 료해하시고 비타민류의 음식을 좋아하는 선생의 식성까지 헤아려 생일상을 손수 준비하시였다. 홍명희선생에게 감격을 준 생일상은 이렇듯 김정숙어머님의 은정어린 손길에 의하여 마련되였던것이다.

격정에 목이 메인 홍명희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일도 없는 자기를 이처럼 환대해주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서울에서 아무리 자식들과 친척들이 차려주는 큰상을 받고 큰절을 받은들 어찌 오늘의 이 영광에 비길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홍명희선생이 받아안은 60돐생일상, 그것은 민족적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한 애국인사에게 베푸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의 정화였고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드는데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신 김정숙어머님의 뜨거운 지성이 낳은 사랑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와 관련하여 홍명희선생이 후방으로 떠나게 되였을 때였다.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로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까지 세세히 일러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떠나려고 할 때 무엇인가 생각하시다가 서랍을 여시고 한자루의 권총을 꺼내시였다.

그러시고는 이 권총은 김정숙동무가 쓰던것인데 기념으로 드리겠다고 하시였다.

윤기가 흐르고 손때가 오른 한주먹안에 들 자그마한 권총이였다.

녀사께서 애용하시던 권총을 감히 어떻게 받겠는가고 말씀올리는 홍명희선생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동무는 산에서 싸울 때에는 물론 조국에 돌아와서도 아직 나라가 통일되지 못하고 남조선에 미국놈들이 있는데 손에서 총을 놓을수 없다고 하면서 항상 이 권총을 가지고다니며 나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선생은 이 권총을 가지고다니면서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미제를 때려부시며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성취하는데 힘써주리라고 믿습니다.

총대처럼 변심없이 애국애족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가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당부가 담겨져있는 권총을 받아안은 홍명희선생은 어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하자고 하시며 한품에 안아주시고전쟁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시기인 오늘에는 한대오에 선 동지로 믿어주시고 아껴주시는 그이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것인가 하는것을 더욱 심장깊이 느끼였다.

전후에 일부 편협한자들이 공화국정권은 로농정권인데 량반출신의 인테리이며 당적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해서 함께 일할수 있는가고 하면서 홍명희선생을 시비해나선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의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 어떻단말인가, 오랜 인테리인것은 사실이나 왜정세월에 일본놈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홍선생은 해방후 제국주의편으로 따라간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길에 들어섰다, 당과 국가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정력을 바쳐 일하고있는데 중요간부로 되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가고 되게 꾸짖으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을 만나신 기회에 당은 선생님을 믿으니 마음놓고 일하라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으라고, 당이 있는 한 누구도 선생님을 다치지 못한다고 결연히 말씀하시면서 다시금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주체47(1958)년 5월 1일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하게 진행된 5. 1절경축행사가 끝났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석단에서 내리시는 길로 홍명희선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시고 함께 교외의 한 호수가로 나가시였다.

만발한 봄의 정서와 그림같은 풍치를 담고 펼쳐진 호수의 기슭에는 자그마한 배 한척이 매여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명희선생의 팔을 다정히 이끄시여 배의 고물쪽에 앉히시였다. 그러시고는 선생이 젊었을 때는 배를 탔겠는데 이젠 나이가 많으니 언제 타보았겠는가고, 그래서 여기 호수로 왔다고 하시며 몸소 노를 잡으시는것이였다.

이날 내각수상과 부수상이라는 관직의 차이를 초월하여 노를 저으시며 배를 호심깊이 몰아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수령님께 모든것을 다 맡기고 청춘이 되살아난듯 환하게 웃고있는 홍명희선생의 모습은 그날의 뜻깊은 사연을 전해주는 력사의 화폭으로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 새겨지게 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나선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굳게 믿어주시는 한없이 숭고한 사랑의 화폭앞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이시기에 앞서 절세의 애국자,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풍모를 다시한번 새겨안게 된다.

정녕 홍명희선생은 절세의 위인들의 품에 안기였기에 재생의 삶을 지닌 그날로부터 한생을 추호의 드팀도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을 꿋꿋이 걸어올수 있었고 민족사에 애국자의 이름을 떳떳이 새길수 있었다.

복잡다난한 해방직후의 남조선정국에서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그 당수로 활약해온 민주인사이며 정치인인 장권선생도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다가 평양에 남은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1948년 4월 어느날, 장권선생은 뜻밖에도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아안게 되였다.

흰 명주천에 붓글씨로 쓴 그 초청장을 받아든 장권선생은 솟구치는 마음속의 흥분을 누를수 없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불러주시다니?!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아시고 초청장까지 보내주시였을가?!…)

몇번이고 초청장에 새겨진 글발을 더듬는 그의 눈앞에는 애국의 길을 찾아 헤매이던 지나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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