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행복의 창조자』 중에서
4. 화목한 대가정의 어버이
1). 위대한 사랑의 품
□ 차별을 모르는 사랑
김정일장군님께서 가꾸시는 사랑의 화원에는 그 어디에나 꽃들이 만발하고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차별없이 품에 안아 내세워주시는 김정일장군님의 어버이사랑속에 인민들은 누구나 인간의 참된 삶을 마음껏 누리고있다. 그러한 사람들속에는 재조외국인들의 밝은 모습들도 보인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저러한 환경과 조건으로 하여 자국내 주민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외국인들이 있다. 공화국에도 많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재조외국인들이 있다.
력사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내에서 살고있는 타민족은 민족배타주의와 인종주의의 대상으로,천대와 멸시의 대상으로 되여왔다. 그것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나라들속에서도 계속되고있다. 최근년간에 프랑스에서 생존권을 요구하여 일어난 외국인들의 폭동이 뚜렷한 실례로 된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재조외국인들이 그 어떤 구속과 제재도 받음이 없이 인민의 한 성원으로 평등하고 보람찬 삶을 마음껏 누려가고있다. 이 자랑찬 현실은 인간사랑의 화신이신 경애하는김정일장군님의 인덕정치, 광폭정치의 빛나는 결실이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나라안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민족과 혈통에 관계없이 따뜻이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숭고한 뜻을 지니시고 재조외국인들의 마음속에 사소한 그늘이라도 질세라 세심한 은정을 베풀어주고계신다.
주체85(1996)년 11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한 외국인과 그들의 자녀들의 생활에 대하여 료해하게 되시였다.
그로 말하면 1960년대 조선에 류학을 와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인녀성과 가정을 이루고 그 대학에서 연구사로 일하고있는 카토트 윌로틱토라는 인도네시아사람이였다. 그는 환갑이 되는 나이까지 공화국의 인민들과 꼭같이 살아왔고 연구활동도 마음껏 하여 학사의 학위도 받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료해하시고 그와 그의 자녀들의 생활을 차별없이 잘 보살펴줄데 대하여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로부터 얼마후인 12월 25일 환갑을 맞는 카토트에게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공학박사학위를 수여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로동신문》과 TV를 통해 그를 세상에 널리 내세워주시였다.
카토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인덕정치, 광폭정치의 빛발아래 세상에 부럼없는 행복한 생활을 누려온데 대하여 감동깊게 회고하면서 《저와 같은 외국인도 아무런 민족적차별도 없이 키워주고 내세워주고 인생을 빛내여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은 진정 만민이 안겨살 은혜로운 품,한없이 따사로운 태양의 품입니다.》라고 격정을 터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광폭의 사랑과 믿음은 그만이 아닌 재조외국인모두에게 뜨겁게 미치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12월을 비롯한 여러 기회에 공화국에서 살고있는 일본인녀성들과 외국인자녀들의 생활을 료해하시고 그들을 잘 돌봐주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라일이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몸소 그들을 만나시여 사업과 생활을 알아보시며 뜨거운 친어버이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주체87(1998)년 6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돌아오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여러명의 외국인자녀들을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모두는 《장군님!》 하고 목메여 부르며 그이의 넓은 품에 안기였다.
《이게 모두 얼마만이요. 그새 잘들 있었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낯익은 얼굴들을 정겹게 둘러보시며 물으시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버이장군님, 뵙고싶었습니다.》, 《꿈결에도 뵙고싶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였다.
《나 역시 동무들이 보고싶었습니다. 내가 동무들을 만나본지가 벌써 15년이 되였습니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매 사람에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 아이들은 몇이나 되며 몸들은 아픈데가 없는가를 물으시면서 누구는 아직 나이에 비해 젊어보인다고 기뻐하시였고 누구는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며 마음쓰시였다. 그러시고는 화제를 돌리시여 지난 기간 당의 문예정책을 높이 받들고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그들을 치하하시면서 매 사람들의 공로를 사실을 들어가며 평가해주시였다. 그 자리에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그의 아버지때부터 각별히 보살펴주신 사람도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지금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언제 사망하였는가고 물으시면서 가슴아파하시였다. 그는 장군님께 수십년전에 자기 집에까지 몸소 찾아오시여 우리 당은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차별하지 않으니 마음껏 재능을 꽃피우라고 하시던 잊지 못할 그날의 일을 돌이켜보면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부모들이 한생을 값있게 보냈다고 목메여 말씀올렸다.
장내는 눈물의 격랑, 감격의 폭발로 진동하였다.
사랑에 보답하는것은 인간의 응당한 도리이고 미덕이다. 재조외국인들은 민족과 혈통에 관계없이 혼연일체의 대가정의 한성원으로 믿고 내세워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어버이사랑에 보답하고 나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기 위해 성실히 일하였으며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어려운 길도 조선인민과 함께 걸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럴수록 그들의 소행을 기특하게 여기시여 대회의 높은 연단에도 불러주시고 사랑의 기념촬영도 해주시였으며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시였다.
그 하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속에는 80살을 맞는 한 평범한 일본인녀성에게 생일상을 보내주신 이야기도 있다.
주체93(2004)년 6월 8일 사리원시 운하1동에 사는 재조일본인녀성 도민숙은 뜻밖에도 경애하는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일본 도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부자집 하녀로, 고무공장 로동자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온 그는 제주도태생인 한 조선인청년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1960년대 중엽 사회주의조국에로 귀국하는 남편을 따라 공화국에 삶의 닻을 내린 그는 아무런 민족적차별도 모르고 마음껏 일하며 보람찬 생활을 누려나갔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주고 도급기관의 일군으로 내세워준 은혜로운 사회주의제도를 위해 그는 년로보장을 받은 이후에도 나라와 인민을 위한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
수십년간 인민군대를 원호하고 중요대상건설장들을 지원하였을뿐아니라 수십t의 유휴자재를 수집하여 나라에 보탬을 주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시여 여러차례에 걸쳐 공화국의 훈장을 수여하도록 하시고 전국적인 미풍선구자대회에 참가하여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도 안겨주시였으며 또다시 생일상을 안겨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푸시였다.
도민숙과 그의 가정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면서 장군님의 선군령도를 한마음한뜻으로 받들며 부강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할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재조외국인들의 생활을 조선사람들과 사소한 차별도 없이 따뜻이 보살펴주시였을뿐아니라 고향에 다녀오고싶어하는 그들의 소망도 헤아려주시였다.
주체86(1997)년에 일부 재조일본인녀성들속에서는 고향에 다녀오고싶다는 반영이 제기되였다. 사실 당시 나라안팎의 정세가 복잡하고 어려운 때에 재조일본인들의 고향방문을 실현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북침전쟁소동이 그칠새없고 여러차례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나라의 경제사정도 어려웠다. 게다가 국토분렬로 가족, 친척들의 생사여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재조일본인녀성들이 일본에 있는 가족,친척들을 만나보고싶어하는 마지막소원까지도 헤아리시고 그것을 풀어주시는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 령토에 있는 사람이라면 민족과 혈통에 관계없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따뜻이 보살펴주어야 하며 그들의 마음속소원까지도 자신께서 풀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재조일본인녀성들의 고향방문과 관련하여 여러차례의 귀중한 말씀을 주시고 고향방문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고향방문단 15명 모두에게 새 옷과 신발을 비롯하여 개체준비품들을 빠짐없이 다 마련해주도록 하시고 일본의 친척, 친지들에게 줄 기념품들이며 지어 묘소를 찾을 때 부을 고급술까지도 안겨주도록 하시는 친어버이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재조일본인녀성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헤아려주시여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김정일장군님을 어버이로 모신 공화국공민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안고 일본땅 그 어디에서나 떳떳이 행동하였다.
주체86(1997)년 11월 8일 저녁 제1차 재조일본인녀성고향방문단 성원들이 일본 나리다비행장에 내렸을 때였다.
순식간에 수백개의 마이크와 촬영기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400여명의 일본국내외기자들이 내든 마이크와 렌즈숲속에 선 방문단성원들의 모습은 그때 과연 어떠했던가.
《차별하던가?》
《오히려 더 큰 우대를 받고있다.》
《병약한 몸인줄 알았는데?…》
《보다싶이 건강하다.》
…
무수한 질문소나기속에서 마이크에 흘러드는 진심에 넘친 당당한 목소리, 화면을 채우는 밝고 건강한 모습들,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은 한 기자는 어머니들은 어떻게 되여 그렇게 자세가 당당한가고 물었다.
《우리가 당당하고 대담한것은 우리모두를 친자식처럼 안아키워주시고 내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계시기때문이다.》
그들이 귀로에 오르기에 앞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기자가 그들에게 묘한 질문을 하였다. 그때 한 녀성이 가슴을 쭉 펴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제국주의자들의 고립압살책동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는 조건에서 인민들이 물질생활에서 그리 풍족하지 못한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난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에도 책임이 있다, 오늘 조선인민은 조금도 락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온 세상이 우러러따르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신다, 하기에 우리는 앞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일본보다 더 잘살수 있다는 신심에 넘쳐있다고 말하였다.
그때의 광경을 일본의 NHK TV방송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그렇게 말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일본사람들의 가슴이 뜨끈뜨끈해졌다. 기자들도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것을 느꼈다.》
진정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속에 세상에 부럼없는 삶을 누려가는 무한한 행복, 장군님만 계시면 언제나 승리하고 잘살수 있다는 확신이 펼쳐놓은 자랑스러운 화폭이였다.
재조일본인녀성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어버이사랑속에 꽃피는 자신들의 행복한 삶에 대하여 친척, 친지들에게 소리높이 자랑하였다.
장군님께서 자기들을 아무런 차별도 없이 한식솔로 믿어주시며 조선로동당원으로 키워주신 사실,대회에도 불러주시여 기념촬영도 해주시고 귀중한 선물도 보내주신 사실, 일본인녀성들이 올리는 소박한 편지까지도 빠짐없이 보아주시고 회답서한도 보내주신 사실 등 자기들의 행복한 생활을 그대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한 방문단성원의 언니는 동생의 행복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감동하여 꽃바구니를 형상한 보석쁘로찌를 동생의 가슴에 모신 수령님의 초상휘장밑에 정히 달아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은 정말 매일, 매 시각 꽃바구니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구나!》
일본의 정계인사들은 《일본녀성들의 고향방문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일조간의 관계정상화에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