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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수난의 바다를 헤쳐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13-02-21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수난의 바다를 헤쳐 

해방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녀성들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문제는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을 다그치는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나섰다.

민주조선건설에 떨쳐나선 북조선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오는 봉건륜리도덕의 페습으로 인하여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천대와 멸시속에서 살아오던 녀성들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문제를 민주주의혁명의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우고 주체35(1946)년 7월 30일 남녀평등권법령을 발포하였으며 그것이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고있었다. 그리하여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사회정치생활에 참가하지 못하던 녀성들의 처지는 하루아침에 달라지게 되였다.

북조선에서 녀성들이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해방되여 새 조국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는 현실에서 힘과 용기를 얻은 남조선의 애국적인 녀성들도 북에서와 같은 민주개혁의 실시와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나섰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후 남조선정세가 그처럼 복잡할 때에 애국적인 녀성들이 온갖 탁류에 물들지 않고 잡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의 존엄을 지키고 권리를 찾는 투쟁의 길, 진정으로 나라의 통일을 위한 길을 꿋꿋이 걸을수 있도록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주시였으며 주실수 있는 사랑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1946년 여름 어느날 해주에서는 나이지숙한 두 녀성이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적인 상봉의 기쁨을 나누고있었다. 그들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온 당시 남조선민주녀성동맹 위원장이였던 류영준선생과 그를 마중나온 해방전 민족주의자의 대표적인물이였던 안창호의 누이동생 안신호선생이였다. 

류영준(1890. 11. 24-1972. 9. 18) 사회활동가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 그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주체37(1948)년 8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2기 대의원. 조국통일상수상자.

 

류영준선생은 어떤 사연을 안고있었기에 녀성의 몸으로 38°선을 넘어오게 되였는가.

사람은 때로 뜻밖의 조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믿고 기대하던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꺼지고 온몸과 마음이 절망의 바다에 깊이 잠겨드는것 같은 그러한 때가 있는것이다.

류영준선생은 해방후 서울에서 바로 이러한 정신적고통을 체험하였다. 한때 민족주의운동을 한다고 하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제가 남조선에 기여들자 《해방자》, 《원조자》가 왔다고 떠받들며 하루아침에 친미로 변신한데서 받은 좌절과 실망의 아픔이였다.

나라가 해방되면 응당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손을 잡고 자주독립국가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통분함을 금할수 없었다.

(인간이 어쩌면 저럴수가 있는가. 일본을 대신하여 남조선에 기여든 미국이 그렇게도 좋아서 저렇게 떠받들고있으니 그렇다면 지난날에 부르짖던 독립은 무엇을 위한 독립이였는가. 나라를 위한것이였는가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것이였는가?)

일찌기 민족주의운동에 관여하였던 류영준선생은 서울에서 《근우회》를 뭇고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반일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었다. 그는 병원의 간판을 걸고 치료로 생업을 이어가면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민족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온갖 지성을 아끼지 않았었다.

바로 이처럼 민족주의독립운동자의 한사람이라는 남다른 자부심과 일본이나 미국 할것없이 일체 침략적인 외세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깨끗한 민족적량심을 지녔던 류영준선생이였으니 비록 한때나마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사람들의 배신행위에서 받은 충격이 크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애국의 길을 모색하면서 《혁명가》로 자처하던 사람들과도 접촉해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던 그는 남조선민주녀성동맹이 결성되자 위원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 나날에 애국적인사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는 이들로부터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자기를 믿어주실뿐아니라 애국사업에 헌신하고있는것을 높이 평가해주고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녀맹사업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갔다.

그는 녀맹대렬을 각계각층의 애국적녀성들로 확대해나가는 한편 북조선에서 실시한것과 같은 토지개혁을 남조선에서도 실시할것을 요구하고 축첩, 기생제도, 인신매매제도를 반대하며 남녀평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던 미제와 그 주구들은 탄압의 마수를 뻗치여 군중대회에서 김일성장군님을 지지찬양하는 연설을 했다고 그를 체포하여 온갖 박해를 가하였다. 더우기 이때 그를 괴롭힌것은 《혁명가》라고 자처하는자들의 모해책동이였다.

그자들은 어떻게 류영준선생과 같은 경력이 복잡한 녀자가 중요한 사업을 맡아할수 있는가고 여론을 퍼뜨리면서 그가 스스로 자리를 내놓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류영준선생은 억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쪽에서는 미제와 그 주구들이 탄압을 가하고 다른쪽에서는 비렬한 모해책동이 감행되고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이 남조선땅에서 나는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런 괴로운 마음을 하소할 위인을 남조선에서는 찾을수 없었다. 그러한분은 오직 한분, 온 민족이 우러러받드는 김일성장군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전부터 안면이 있던 안신호선생을 통하여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 자기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올리게 되였다.

그의 편지를 받아보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격분해하시며 안신호선생에게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기대는 변함이 없다는것을 잘 알려주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 자신께서는 회답편지를 길게 쓰지 않을터이니 안선생이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해주면서 우리의 의도를 알려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안신호선생이 해주로 오게 되였고 류영준선생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안신호선생을 통하여 김정숙어머님의 회답편지와 말씀을 전달받은 류영준선생은 자신에게 안겨주시는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어머님의 믿음과 사랑이 너무도 커서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이날 그는 그리스도교신자이며 유명한 민족주의자의 동생인 안신호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서 녀맹일군으로 활동하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있다는것을 알고 다시한번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혁명가》라고 하면 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을 무턱대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그였다.

그러나 안신호선생의 행복한 모습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종교인이건 민족주의자이건 애국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한품에 안아 참된 길로 이끌어주시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시며 자기에게 안겨주신 이 믿음도 바로 여기로부터 우러나오는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가슴속깊이 자리잡게 되였다.

(오직 한분, 김일성장군님만을 믿고 따르자!)

이렇게 수난의 바다를 헤매이다가 위대한 태양의 빛발을 받아안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확신한 류영준선생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일하였다.

그는 녀맹조직을 꾸려도 각계각층의 광범한 민주녀성들로 꾸리였고 투쟁을 벌려도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며 통일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그리고 미제와 그 주구들에게 체포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을 때에도 우리 녀성들이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따른것이 어찌 죄로 되는가고 추상같이 웨치며 애국의 지조를 꿋꿋이 지켜싸울수 있었다.

오직 민족의 위대한 태양만을 따르겠다는 신념의 기둥을 심장속깊이 세워놓았기에 그는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아안았을 때 남먼저 북행길에 오를수 있었고 주저없이 평양에 삶의 닻을 내릴수 있었다.

류영준선생에게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각별하시였다.

남조선에서 차례지는것이란 탄압과 박해, 모해뿐이던 그에게 공화국에서 안겨준것은 믿음과 영예와 사랑이였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되였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으로,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서울을 떠나올 때 잃어버린 외동딸때문에 걱정한다는것을 아시고 조국해방전쟁의 그 어려운 속에서도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으며 녀성단체들의 국제적인 회합이 있을 때에는 그를 조선녀성대표로 파견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로년기에 이르렀을 때에도 중요한 직무에서 사업하도록 변함없는 믿음을 안겨주시였으며 그가 사업을 그만두게 되였을 때에는 류영준선생은 공로자이므로 전과 꼭같은 대우를 해줄데 대한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하기에 류영준선생은 운명하기 전에 자기의 한생을 총화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일생에 여러 나라들을 넘나들며 이름있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독립운동자, 박사, 영웅이라고 하는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지만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은 이 세상 천하에 그 어디에도 없다. 수령님은 정말 하늘이 낸분이시다.》

하늘이 낸분!

정녕 이것은 오랜 세월 수난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서 참된 삶을 빛내인 류영준선생만이 아니라 민족적량심과 애국의 마음을 안고 그 품속에서 삶을 빛내인 이 나라 모든 녀성들의 한결같은 심장의 웨침이였다.

혈혈단신 녀성의 몸으로 38°선을 넘어 북반부에 들어와 삶을 빛내인 사람들가운데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였던 신진순선생도 있다.

주체82(1993)년 2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새 조국건설의 첫 시기부터 인민의 참된 문학예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여온 몇몇의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일행중에 있던 신진순선생을 알아보시고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깊은 감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신진순동무는 내가 해방직후부터 알고있는 사람입니다. 그때 나는 신진순동무와 자동차도 같이 타고다녔습니다. 신진순동무는 서울에 있던 제국대학을 나온 유일한 녀성졸업생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직후부터 알고있는 사람이라고 감회깊이 추억해주신 신진순선생, 그는 어떤 녀성이기에 근 반세기가 되여오는 때에 위인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것인가.

신진순선생은 10대에 벌써 재능있는 학생으로 알려졌지만 나라잃은 식민지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민족적억압과 멸시를 면할수 없었다.

대학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은 그는 오래전부터 흠모해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숙명녀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백두산에서 일제와 싸우고계시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이를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는 흠모의 마음을 깊이 간직해왔다.

김일성장군님을 흠모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였기에 그는 대학시절에 조선옷을 입고다닌다고,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을 한다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악착한 고문까지 가하는 일제의 온갖 탄압과 박해를 꿋꿋이 이겨내고 민족적량심과 애국의 지조를 지켜낼수 있었다.

해방후 그는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날마다 서울역전광장에 나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서울입성을 기다렸다. 하지만 애타게 고대하던 그날은 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뜻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것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온 겨레의 막을수 없는 흐름이였다.

이 력사의 흐름을 타고 신진순선생도 해방된 날로부터 열흘남짓하였던 8월말 홀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가 아니라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평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였다.

그는 주체34(1945)년 9월 하순 어느날 그처럼 뵈옵고싶던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동무에 대하여 이미 알고있었다고 하시며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신 다음 나이는 몇살인가, 고향은 어디며 거기엔 누가 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고향은 경기도 리천이고 집에는 홀어머니와 오빠, 동생들이 있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넉넉치 못한 생활에 녀자의 몸으로 경성제국대학까지 나왔으니 정말 용타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전공학과목에 대하여 알아보신 후 우리 나라 녀성으로서 악독한 일제의 차별이 심한 경성제국대학을 나온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대학을 나온 녀성인테리가 혁명을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온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우리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있다고, 동무는 앞으로 혁명을 하겠다는 그 훌륭한 결심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인민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계몽활동을 더욱 활발히 벌려야겠다고, 이것은 새 조국앞에 지니고있는 지식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헤여질 때에는 앞으로 어려워 말고 자주 찾아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신진순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새 조국건설의 보람찬 길에서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다 바쳐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경험도 전혀 없고 사회정치활동도 해본 일이 없는 그가 녀성들과의 사업을 원만히 잘해나가도록 그에게 사업방법으로부터 사업작풍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몸소 가르쳐주시였다.

한번은 그를 불러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새 어떻게 지내고있는가, 일은 잘되고있는가, 애로는 없는가고 물으신적이 있으시였다.

난생처음으로 사회정치활동에 나선 자기의 고충을 헤아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신진순선생은 군중앞에 나서는 재간이 없어서 사회정치활동을 벌리기가 여간만 힘에 부치지 않다고, 차라리 문학창작이나 하면 혁명에 더 보탬을 줄수 있을것 같다고 마음속에 묻어두고있던 생각을 그대로 말씀올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다가 이윽하여 하긴 동무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니 그런 생각을 할만도 하다고 하시고는 그에게 물론 창작활동을 통해서 혁명에 이바지하겠다는 동무의 생각은 좋은것이라고, 우리가 지난날 산에서 싸울 때 보니 한편의 시가 백자루의 총에 못지 않게 힘이 있었댔다고, 동무는 문학을 전공했으니 앞으로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러나 동무는 아직은 북조선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기때문에 현실을 잘 모를수 있다고, 그러니 지금은 글을 쓰기보다 창작을 위한 준비를 잘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깨우쳐주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눈을 틔워주시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귀중한 말씀을 해주시고 또 그가 앞으로 꼭 훌륭한 녀류작가가 되기를 바라시는 고무의 말씀도 거듭 해주시였다.

그 품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녀학생에 불과하였던 그는 능란한 사회정치활동가로 자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민주주의기발아래 각계각층의 녀성들을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림으로써 수많은 녀성들을 대중적인 민주주의조직에 망라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새 조국건설에 자기의 열정을 다 바치도록 이끌어주시는 한편 그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신진순선생이 새 가정을 이루었을 때에 수령님께서는 그의 남편이 대학시절부터 일제를 반대하는 항거의 길에 나섰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여러해동안 감옥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이야기도 들어주시였고 또 신진순선생의 남편이 어느 한 학교의 교단에 서있을 때에는 몸소 그의 강의까지 들어주시는 더없는 영광도 안겨주시였다.

신진순선생의 생활을 극진히 돌봐주신 이야기가운데는 그가 첫아이를 낳게 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친부모가 되시여 뜨거운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은정깊은 이야기도 있다.

해방후 어느해 3월 초순이였다.

해산을 한지 며칠 안되던 그날 그의 집으로는 한 일군이 커다란 지함을 들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방금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자기를 이곳으로 떠나보내면서 하신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전하였다.

며칠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진순선생이 해산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가 서울에서 우리를 찾아왔기에 평양에는 그의 친척들이 없다고 하시면서 산모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것이 걱정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와 그의 남편은 건국사업을 위하여 밤낮없이 뛰여다니다나니 해산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그를 잘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김정숙어머님께서 애기옷과 산모에게 필요한 보약과 식료품을 준비하게 되였던것이다.

바로 그날 그 일군을 찾으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자신께서 준비하신것을 그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시면서 지금 내가 바쁜 일이 제기되여 가지 못하는데 며칠후에 시간을 내서 가겠다고 전하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는 녀성지식인으로서 그동안 장군님의 건국로선을 관철하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한 녀성혁명가이라고, 그가 남조선에 부모형제들을 두고 장군님을 찾아온것만 보아도 그의 기특한 소행을 알수 있다고,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는가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날 여러벌의 애기옷과 애기포단, 산꿀과 보약이며 특산식료품이 가득 들어있는 지함을 열어보며 신진순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그토록 다심하시고 자애깊으신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백두산위인들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의 품에 안겼기에 그는 그후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마음껏 꽃피워 재능있는 작가로 자라날수 있었고 사람들을 부강조국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데 이바지한 수많은 시작품들과 《산촌의 새 력사》(상, 하), 《남녘마을아이들》을 비롯한 장편소설들을 창작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9(1970)년 3월 8일 그가 공화국의 품속에서 우리 녀성들과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담아 긍지높이 노래한 시 《찬란한 해빛아래 우리는 행복합니다》가 《로동신문》에 나갔을 때에도 그것을 보시고 무척 기뻐하시며 그를 가까이 불러주시는 더없는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그날 이른봄의 찬바람을 맞으시며 정원에 나오시여 선생을 기다리시던 수령님께서는 달려와 인사를 올리는 그의 손을 꼭 잡으시더니 《머리가 세였구만!》 하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진순선생이 53살이라는것을 아시고는 《일없습니다. 이제도 20년은 더 일할수 있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쓰라고 고무도 해주시고 또 그의 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이날 그가 날도 저물어지고 또 수령님의 바쁘신 시간을 너무 오래 축내고있음을 깨닫고 이젠 그만 돌아가려는 뜻을 말씀올리자 저녁식사시간이 되였는데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고 하시며 그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저녁상을 받게 되였다.

참으로 선생이 받아안은 영광과 크나큰 사랑은 끝이 없었다.

신진순선생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뜨거워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방직후 참된 삶의 길,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을 찾아서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그를 재능있는 작가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로년기에 이른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만나실 때마다 건강이 어떤가고, 건강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건강을 위하여 온갖 치료대책을 취해주군 하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날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제의 《동조동근》설에 맞장구를 칠 때에 비록 연약한 녀학생의 몸이지만 그가 끝까지 민족적절개와 애국적지조를 지켜냈을뿐아니라 자기의 높은 실력으로 악독한 일제에게 조선사람은 슬기롭고 재능이 있으며 존엄있는 민족이라는것을 보여준것이 대견하시여 그를 녀걸이라고 하시며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생일 80돐을 맞던 주체86(1997)년 5월에는 생일상을 보내주시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바로 이것이 온 겨레를 한품에 안아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로 이끌어주시는 백두산3대장군들의 위대한 사랑의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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