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물
  • 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38°선을 넘어온 청년학생들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13-02-27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38°선을 넘어온 청년학생들

 

해방후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중에는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뿐아니라 청년학생들도 있었다.

주체35(1946)년 8월 어느날이였다.

40나이가  가까와보이는  사람과 20대의 청년이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38°선을  넘고있었다.   그들이  바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두번째로 평양을 찾아가는 서울법정학교의 교원과 학생이였다.

서울법정학교는 해방전부터 사립전문학교로 운영되여온 학교로서 이 학교에는 가난한 집의 자식들이 비교적 많이 다니였다. 그래서인지 해방을 맞은 이 학교 학생들의 희망은 남달리 컸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땅에서 마음껏 배워보려던 그들의 희망과 포부는 여지없이 짓밟히고말았다. 미《군정청》이 1946년 3월 《무허가학교페쇄령》이라는것을 공포하고 진보적경향이 강한 서울법정학교와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강제로 페쇄하는 만행을 감행하였기때문이였다.

서울법정학교의 학생들은 미《군정청》의 강제페교를 반대하여 학교페쇄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학교페쇄를 반대하며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구호를 웨치면서 과감히 싸웠다. 특히 그들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학원탄압만행을 반대하여 서울의 각급 학교 학생들과의 공동투쟁도 힘있게 전개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빼앗긴 배움의 교정을 다시 찾을수 없었다.

이러한 때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평양에 종합대학을 세우신다는 격동적인 소식이 38°선을 넘어 서울에도 전하여졌다. 배움의 길을 잃고 울분에 쌓여있던 법정학교 학생들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우리모두 38°선을 넘어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자!

법정학교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한자리에 모여앉아 이렇게 토론하였다. 하지만 해방직후의 어렵고 복잡한 환경에서 38°선을 넘어간다고 하여 곧 배움의 길이 열릴것인지는 누구도 담보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장군님께서 남녘의 학생들에게도 배움의 길을 열어주실것을 청원하는 서울법정학교 교원, 학생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안고 두명의 대표들이 그해 7월말 서울을 떠나 여러날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정작 평양에 도착하고보니 그들의 머리에는 자기들의 행동이 너무나 당돌하지 않았는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장군님께서 아무 기별도 없이, 더구나 서울에서 불쑥 찾아온 우리들을 어떻게 대해주실가. 여기에도 배우려는 청년들이 많겠는데 장군님께서는 한두명도 아닌 수많은 법정학교 학생들의 소원을 받아주실가?)

서울에서 법정학교 대표들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배움의 길을 잃게 된 그들의 처지에 대하여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도록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처럼 념원하던 소원을 이루게 된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을 하루빨리 남녘의 학우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날로 서울로 내달았다.

이  기쁜  소식에 접한  서울법정학교의 학생들은  대표들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을  흘리였다.  그러면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는가, 그이께서 우리의 청을 받으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였는가고 저저마다 물어보았다.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지 못하고 한 일군으로부터 그이의 말씀을 전달받았다는 대표들의 말을 들은 학생들의 얼굴에는 금시 실망의 빛이 어리였다.

학생들은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옵지 못하고 어떻게 많은 남녘학생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대표들의 말을 믿지 못해하였다.

학생들과 교원들은 또다시 대표들을 평양으로 파견하면서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고 직접 말씀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서울법정학교의 두명의 대표들은 서울을 떠나 다시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오게 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서울법정학교 교원, 학생대표들을 만나주신것은 주체35(1946)년 8월 30일이였다.

이날 어느 한 회의를 지도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울법정학교 대표들이 또다시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회의휴식시간에 몸소 그들을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해하는 대표들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무더운 날씨에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전번에 동무들이 찾아온것을 시간이 없어 만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온 동무들을 만나니 매우 반갑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미제와 그 주구 리승만도당은 청년학생들의 강력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서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고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미《군정청》은 지난 6월 《국립서울대학교안》이라는것을 조작하고 얼마전에는 그것을 법령으로 공포하였다고, 그들이 조작한 《국대안》은 본질에 있어서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고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기 위한것이라고, 남조선청년학생들이 《국대안》을 반대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할것을 희망하고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남조선의 청년학생들이 북조선에 들어와서 공부하는것을 환영합니다.》

어제는 물이 없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있는 남녘의 농민들에게 귀중한 생명수를 보내주시고 오늘은 또 남녘의 청년학생들에게 뜨거운 혈육의 정으로 배움의 넓은 길을 활짝 열어주시는 김일성장군님!

대표들이 격정에 목메여하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동무들은 빨리 서울에 나가 학생들을 데려와야 하겠다고, 우리는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들이 학습과 생활에서 불편이 없도록 할것이라고, 동무들은 소원대로 북조선에 들어와 공부할수 있게 된것만큼 민주학원에서 마음껏 배워 새 조국건설의 훌륭한 역군으로 되여야 하겠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이날 차츰 어려움도 잊고  두번째로  자기들이 평양으로 오게  된 경위를 말씀올리는  대표들의  이야기를 듣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서울에 있는 학생들의 요구가 그렇다면 문건과 신임장을 해주도록 하자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소식을 고대하고있을 학우들에게로 한시바삐 달려가고싶어 하는 학생대표의 마음까지 헤아려 렬차시간표에도 없는 특별기관차까지 마련해주시였다.

목마르게 소식을 기다리고있던 법정학교의 학생들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온 이야기를 듣고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이께서 보내주신 대학입학을 승인하는 문건과 신임장을 보고 또 보면서 감격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수십여명의 서울법정학교 학생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뉘여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들이 서울을 떠나오던 9월초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교육사업을 맡아보는 해당 일군들을 부르시여 법정학교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정형을 하나하나 료해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부모의 품을 떠나 북으로 들어오는 그들이 38°선을 넘으면 그곳 인민들이 친혈육과 같이 따뜻이 맞아주도록 당부도 하시였고 또 대학에서는 그들이 들어와 인차 안착해서 공부할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잘 갖추어놓으라고 가르쳐주기도 하시였다.

그러던 주체35(1946)년 9월 12일, 제1진으로 서울을 떠난 학생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여러명의 학생들을 몸소 집무실로 불러주시였다.

몸소 문가에까지 나오시여 그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함께 온 학생들은 다 건강한가, 도중에 다른 일은 없었는가고 하나하나 알아보시였다.

제1진은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제2진의 학생들이 도중에 경찰들에게 체포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색을 흐리시며 어떻게 되여 그렇게 되였는가고 전후사연을 자세히 알아보시였다.

학생대표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도록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가 그들을 바라보시며 《이제 동무들은 자기의 소원대로 북반부로 들어왔으니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마음껏 배워 새 조국건설의 훌륭한 역군이 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믿음에 찬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이날 학생들이 주로 사회과학부문에서 공부하고싶어 한다는것을 알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앞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그러자면 기술인재가 많이 요구된다고, 그러므로 동무들은 모두 법학이나 다른 사회과학만 하려고 할것이 아니라 자연과학부문에도 들어가고 또 일부는 교원대학에도 가서 과학의 여러 부문을 깊이 연구하여 새 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학생들은 자기들의 짧은 생각을 뉘우치고 각기 자기 소망대로 보람찬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그후 경찰에게 체포되였던 제2진의 학생들도 온갖 회유기만을 박차고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대학에서 마음껏 공부하게 되였다.

이처럼 남녘의 청년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학부형이 되시여 학습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어느날 김일성종합대학의 기숙사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농민들의 애국미로 종합대학을 세울 때 북반부의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들만 받아 공부시키자는것이 아니였다고 하시며 여기에 남조선의 로동자, 농민들의 아들딸들도 데려다 공부시킬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남조선에서 온 학생들의 이부자리까지 만져보시고 솜도 더 두툼히 넣어주고 생일도 크게 차려주어 집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며 모두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맏누이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주체37(1948)년 새해를 앞두고는 그들에게 몸소 선물도 보내주시였으며 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장학금제도를 내왔을 때에는 그 혜택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마음껏 배울수 있도록 온갖 은정을 돌려주시고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그들모두가 나라의 훌륭한 역군이 되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으며 그들이 성과를 거둘 때에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였다.

이렇듯 친부모도 미치지 못할 뜨거운 은정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였기에 배움의 길을 잃고 갈길 몰라 헤매이던 수십여명의 서울법정학교출신의 청년학생들은 새 조국의 어엿한 역군으로 자라날수 있었고 조국과 민족의 부강번영과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자기의 삶을 빛내여나갈수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링크드인으로 보내기 구글로 보내기 레디트로 보내기 카카오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