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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2)의거장병들이 안긴 품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13-03-01

 

 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2) 시련의 나날에 찾은 길 

 

□ 의거장병들이 안긴 품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공화국에서 새 생활, 새 제도가 활짝 꽃피여나고 그 위력이 날로 장성강화되자 이에 극도로 당황해난 미제는 공화국을 요람기에 압살할 흉계밑에 전쟁준비를 로골적으로 다그쳤다.

이미 남조선청장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공화국을 침공하기 위한 침략무력을 준비해온 리승만괴뢰도당은 1949년에 들어서면서 괴뢰군병력을 대대적으로 늘이는 한편 미국에서 수많은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을 들여다 괴뢰군을 무장시켰다. 그리고 38°선일대에 공격진지를 구축하고 숱한 무력을 집결시켜놓았으며 《북진태세》를 갖추게 한 다음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로 무장악당들을 내몰았다. 1947년과 1948년에 이어 1949년 한해동안에만도 공화국에 대한 적들의 무장공격과 각종 도발행위는 2 600여회, 여기에 내몰린 무장악당은 무려 6만 7 000여명에 달하였다.

38°선일대에서는 총포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고 조선반도는 사실상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리승만괴뢰도당은 《북벌》을 단행하기에 앞서 후방의 《안전》을 위하여 남조선에서 활동하고있는 애국적민주주의력량과 유격대를 소멸하라는 미제의 지시에 따라 모든 민주주의적정당, 사회단체들의 활동을 비법화하고 애국적인민들과 진보적인사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 학살하였으며 유격대들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의 요청으로 1948년말까지 이전 쏘련군을 완전히 철수시킨 공화국에서는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전쟁을 방지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안들을 여러차례 천명하였다.

주체38(1949)년 6월 평양에서는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 인사들, 재일본조선인련맹 등 70여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를 열고 나라에 조성된 엄중한 정치정세를 토의하였으며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조국의 평화적통일방책에 관한 선언서를 채택발표하였다.

선언서에는 조선인민자신이 조선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조선에서 미군을 즉시 철거시키고 비법적인 《유엔조선위원단》을 해체하며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중앙정부를 조직할데 대한 평화적조국통일방책이 천명되여있었다.

이어 주체39(1950)년 6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평화적조국통일추진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결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조선립법기관으로 련합하며 이러한 방법으로 성립된 전조선립법기관은 헌법을 채택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앞으로 전조선립법기관을 새로 선거하며 북남조선의 군대를 단일한 군대로 개편하고 《유엔조선위원단》을 조선에서 즉시 철거시킬것을 밝히였다.

민족의 류혈적참화를 방지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모든 방안들은 전체 조선인민과 전세계 진보적인민들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리승만괴뢰도당은 이러한 공명정대한 통일방안들을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미제의 조종하에 오래동안 준비하여온 전쟁의 길에 더 깊숙이 발을 잠그고있었다.

미제의 《단선단정》책동을 거부하고 전조선중앙정부수립을 위한 북남총선거에 적극 참가하여 공화국정권수립에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던 남조선인민들은 원쑤들의 탄압이 혹심한 조건에서도 공화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남조선괴뢰정부를 분쇄하기 위한 장엄한 인민항쟁을 전개하였다.

려수, 순천, 구례, 대구, 오대산, 지리산, 한나산 일대를 비롯하여 남조선전역에서 전개된 인민항쟁과 괴뢰군안에서의 폭동은 공화국을 옹호하며 국토의 완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룰 때까지 싸울 남조선인민들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괴뢰군병사들과 장교들속에서는 리승만을 따라 춤을 추다가는 어느때에 죽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부대를 탈출하여 인민유격대에 넘어가거나 공화국으로 의거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으며 비행기와 해군함정을 몰고 의거입북하는 일까지 나타났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남조선괴뢰군안에서도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무장폭동이 일어나고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집단적으로 의거입북하고있습니다.》

1948년 6월초 마스트에 《김일성장군 만세!》라는 글발을 새기고 붉은기를 날리며 북으로 향하는 한척의 군함이 있었다. 이 군함이 바로 곽이영선생이 기관장으로 있던 350t급소해함 《고원》호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앞으로 저들이 일으킬 침략전쟁의 하수인으로 《국방경비대》와 함께 《해안경비대》라는것을 조작하고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군대인것처럼 청년들을 유혹하였었다. 곽이영선생도 내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되려는 열망을 안고 《해안경비대》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갖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해안경비대》라는것은 창설초기 군모의 모표만 얼치기로 바꿨을뿐 일제의 해군군복을 그대로 입고 규률생활도 일본군대식이였다.

더우기 미제의 각본에 따라 동족을 살륙하기 위한 침략전쟁준비에 광분하는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애국의 피가 끓는 조선청년으로서 제 민족을 위한 진정한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창건하시고 이끄시는 조선인민군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게 되였다.

사실 곽이영선생은 해방전부터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는 흠모의 마음을 남달리 깊이 간직하고 반일애국투쟁에 나섰던 사람이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인천과 목포, 부산과 묵호 등 동, 서, 남해의 《해안경비대》안에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을 활발히 벌리는 한편 군함을 몰고 그이의 품으로 찾아가 조선인민군 해군에 편입되는것을 투쟁목표로 삼은 《해군의용군》이 조직되자 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공화국을 찾아가기 위한 준비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갈수 있었다. 그리고 새 생활창조로 들끓는 공화국에 제일먼저 의거입북한 《통천》호의 뒤를 이어 북행길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남조선에서 《해군의용군》의 맹렬한 활동에 의해 동, 서, 남해에서 여러척의 함선이 련이어 공화국을 찾아가자 미제는 남조선에 함선을 넘겨주는것은 북조선에 주는것이나 같다고 비명을 질렀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곽이영선생의 소행을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그가 소원대로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애국의 길에서 삶을 빛내여나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곽이영선생이 공화국으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날이였다.

처음부터 그의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그가 나를 만나지 못하여 서운해한다는데 내 마음도 마찬가지이라고, 앞으로 만날 날이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고원>호 기관장의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가 생활상 불편한것이 없다고 하지만 옆에 가까운 일가친척 하나 없이 생활하는데 왜 불편한것이 없겠습니까? 그가 말은 하지 않아도 적적할 때가 많고 불편한 점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시고는 그에게 이번 광복기념일에 만경대에 나가 쇠고오라고 하여야 하겠다고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여기에는 곽이영선생을 위하시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뜨거운 은정이 깃들어있었다.

곽이영선생이 공화국을 찾아오는 길에 해방전 평안남도 대동군 경찰서장을 하면서 만경대일가분들에게 못된짓을 많이 하였을뿐아니라 해방후 친미주구로 전락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된 3. 1인민봉기 27돐기념 군중대회주석단에 수류탄을 던지는 치떨리는 만행을 저지르도록 조종한자를 잡아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못내 기뻐하시며 우리 혁명을 위해 큰일을 하였다고, 혁명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공적은 김일성장군님을 결사옹위하는데 있다고 높은 치하의 말씀을 주신 김정숙어머님이시였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어리신 장군님과 함께 《고원》호를 보아주신 어머님이시였다.

이처럼 그의 자그마한 소행을 애국적인 장거로 값높이 평가해주신 어머님이시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두번씩이나 곽이영선생을 만나주시려다가 시간을 내지 못하시여 마음쓰시자 그를 만경대에 보내여 8. 15를 쇠게 하면 좋겠다고 수령님께 말씀올리시였던것이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후에도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며 조국이 통일되면 그를 위해 큼직한 잔치상을 차려주자고, 그를 위해서도 조국을 하루빨리 통일해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또한 그에게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군복을 벗지 말고 투쟁을 잘하라고 일러줄데 대하여서와 앞으로 사업에서 제기할것이 있으면 장군님께 편지로 알리고 생활에서 애로되거나 불편한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알리라고 할데 대하여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절세의 위인들의 이처럼 뜨거운 사랑과 믿음속에 곽이영선생은 군관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였고 한생토록 군복을 입고 자랑스러운 인생길을 걸어올수 있었다.

곽이영선생만이 아니다. 의거장병들속에는 각각 1개 대대씩 이끌고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 강태무, 표무원선생들도 있다.

경상남도 고성의 어느 한 산골마을에서 태여난 강태무선생은 해방이 되자 다시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면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의로운 생각으로 미《군정청》이 관할하던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에 들어갔었다.

불같은 성미와 칼날같은 기질, 정의를 지키려는 마음과 만만치 않은 무쇠주먹의 소유자인것으로 하여 《비호대장》으로 불리우던 그는 졸업후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대대장이 되여 38°선일대에 주둔하게 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는 자기가 잡은 총대가 민족을 위한 총이 아니라 민족을 살륙하기 위하여 미제가 쥐여준 총대이라는것을 통절히 느끼게 되였다. 이런 생각은 그가 38°선일대에 주둔하게 되면서부터 더욱 확고해졌다.

표무원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여난 그는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파수군이 되겠다는 자기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괴뢰군에 들어가 장교로까지 되였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을 살륙하는 피비린내나는 만행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기가 잡은 총대가 과연 누구를 지키기 위한 총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였다.

그가 대대장이 되여 38°선일대에 주둔하고있던 1949년 3월이였다.

어느날 괴뢰국방부 장관을 데리고 그곳에 나타난 미군사고문단장은 무턱대고 공화국의 한 농촌마을에 사격을 가하도록 괴뢰기동경찰대에 명령하는것이였다.

순식간에 수십여호의 평화롭던 마을이 재더미로 되고 마을사람들이 남녀로소 할것없이 무참히 살해되는것을 보는 순간 표무원선생은 자기가 잡은 총대는 민족을 지키는 총이 아니라 살륙하기 위한 총, 이 땅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미제의 리익을 지키기 위한 매국의 총대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강태무, 표무원선생들의 가슴속에는 괴뢰군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동족대결에로 부추기는 미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총을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비록 괴뢰군의 장교로 복무하였지만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흠모의 정이 매우 높았던 그들은 진정으로 로동자, 농민을 위한 정책이 실시되고있는 북조선의 경이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설레이는 마음을 누를길 없었다. 더우기 주체37(1948)년 9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단선단정》책동을 짓부시고 북남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각수상으로 높이 추대되시였다는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였을 때 그이를 그리는 그들의 마음은 불같이 뜨거웠다.

그리하여 강태무, 표무원선생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길을 걷기 위하여 대대전원과 함께 38°선을 넘어 공화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이것은 암흑에서 광명에로 삶을 전환하는 분수령이였고 정의와 진리, 애국의 결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의거장병들의 소행을 높이 평가해주시며 그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평양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공화국을 찾아 인민의 편으로 넘어온 의거부대장병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해주자고 하시면서 환영대회도 열고 연도환영도 크게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또한 어느 한 일군에게 그들에게 이번에 괴뢰군 2개 대대를 데리고 공화국북반부로 의거하여온것을 조선청년으로서 애국적인 소행으로,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남조선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는 행동으로 높이 평가한다는것과 지난날 괴뢰군대대장을 하였지만 함께 손잡고 일할수 있는 검열된 혁명동지로 믿는다는것을 전달하여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의거해온 병사들가운데 앓는 사람은 없는가, 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없는가를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며 모두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아볼데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고 두 대대장에게 권총을 선물로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한목숨바치려는 일념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할것을 열렬히 탄원하는 그들의 청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그들의 요구대로 조선인민군에 입대시켜주시였다.

어제날 미제가 입혀준 군복을 입고 미제가 쥐여준 총을 들고 동족살륙에 내몰리우던 남조선청년들이 인민의 참된 군복을 입고 조국과 민족을 지키는 애국의 총대를 틀어잡게 된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넓으신 도량과 믿음이 낳은 또 하나의 사랑의 전설이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생전환의 새로운 길에 들어섰기에 의거장병들은 그후 미제가 공화국에 대한 전면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을 때 원쑤격멸의 총창을 비껴들고 전투마다에서 불사신의 용맹을 떨칠수 있었으며 조국과 민족이 자기에게 부여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수 있었다.

자기가 잡은 총대가 애국이 아니라 매국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현실앞에 정신적번민으로 방황하다가 마침내 량심의 결단을 단행한 의거장병들속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이였던 송호성선생도 있다.

 

송호성(1889. 9. 19-1959. 3. 24) 애국인사

남조선에서 《국방경비대》련대장, 총사령관, 남조선괴뢰군 사단장 등을 력임. 인민군대의 서울입성환영. 한강도하작전을 비롯한 남반부해방작전에 기여. 주체42(1953)년초 인민군대안에 조직된 《해방전사려단》려단장, 반미구국투쟁동맹 위원장. 주체45(1956)년 7월부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조국통일상수상자.

 

그는 일찌기 어느 나라 군복을 입었건 조선을 빼앗은 일본군대를 패망시키는 전장에 한몸을 바쳐 싸운다면 그것이 조선독립에 기여하는 길이요, 애국의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항일전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가 흘린 피는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해 흘린 피가 아니였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그는 제 나라, 제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되고저 남조선괴뢰군부의 요직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 나라, 제 민족을 지키는 진정한 군대가 아니였다.

남조선괴뢰군이 미제의 대조선전략실현을 위해 조작된 군대라는데 대하여 남조선의 어느 한 출판물은 이렇게 썼다.

《해방이후 군창설의 주체는 미<군정>이였다. 미<군정>은 그들의 전략개념을 수행할 물리적위력으로서 군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미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군은 본질적으로 분단구조의 물리적장벽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분단구조란 해방이후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할 우리 민족의 절대명제를 파괴하고 민족내에 리념적인 대립선을 만들어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영속화하기 위한 구조였다. 따라서 군은 그 출발부터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와는 배치되는것이였다.》

이렇듯 미제가 만들어놓은 군대, 더우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실권을 쥐고있던 군대가 제 나라, 제 민족을 지키는 군대로 될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리치이다.

《…눈물밖에 남은것이 없소. 우리 민족을 봉선화에 비유한다면 군대는 밖에서 불어드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과 같은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오히려 밖에서 불어드는 찬바람에 섞여 꽃잎을 흩어지게 하는 그런 군대가 무엇에 필요하오.》

이것은 후날 송호성선생이 려수군인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폭동현장에 갔던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대답의 한토막이다.

1948년 10월 당시 려수주둔 괴뢰군 제14련대 병사들은 같은 민족이며 부모형제들인 제주도인민들을 탄압하고 살륙하는데 자기들을 내몰려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책동에 더는 참을수가 없어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의로운 투쟁이였다.

군인들의 애국적폭동이 일어나자 남조선괴뢰도당은 미제의 지령에 따라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폭동군토벌》 총사령관으로 송호성선생을 임명하였다. 미군사고문단장과 남조선괴뢰국방부 장관은 그를 불러다놓고 려수군인폭동을 당장 수습하라고 을러메면서 괴뢰군병력을 폭동진압에 내몰것을 강요하였다.

(민족을 지켜야 할 군대가 제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다니?…)

이런 의문을 안고 폭동진압에로 부대들을 지휘하던 그는 주춤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진압군》에게 결사적으로 항거해나서는 고등학교 녀학생들, 폭동군중속에서 울려나오는 《우리는 제주도출동을 반대한다!》는 웨침소리, 《진압군》이 쏜 총에 맞은 폭동군중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거리들…

해방전 기병들을 이끌고 일제를 치는 백병전을 벌리며 가슴을 무쇠로 다졌다는 그였으나 이 모든 광경앞에서 전률하지 않을수 없었다.

려수군인폭동이 있은 후부터 송호성선생의 가슴속에는 자신이 잡은 총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해방자》로 자처하는 미제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미국은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함부로 동족을 향하여 총부리를 대도록 강요하는가. 자기 민족을 쏘고 우리는 누구를 수호한단 말인가. 미국의 본심은 과연 무엇인가?…)

그후 미제가 공화국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그 총알받이로 남조선괴뢰군을 내세우자 미제의 속심을 똑똑히 알게 된 송호성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탄하였다.

(아! 지난날에는 지켜줄 총대가 없어 나라를 일제에게 통채로 빼앗기더니 오늘은 총대는 있어도 넋이 없는 총대, 옳바른 령수를 모시지 못한 군대이다보니 결국은 미국의 값싼 총알받이가 되여 동족살륙의 싸움마당에 내몰리게 되였구나. 그렇다면 내 민족을 위한 참다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마음속번민으로 몸부림치던 그의 뇌리에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김구선생이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시는 진정한 애국자이시라고 격정에 넘쳐 하던 말이 되새겨졌다.

백두산의 청년장군으로, 항일의 전설적영웅으로 그 명성 자자하던 김일성장군!

송호성선생은 일제와의 싸움마다에서 승리를 거두신 김일성장군님을 흠모하여 자신도 그리로 향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해방전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도량이 넓으시다고 하여도 남조선괴뢰군부의 요직에 있던 자신을 받아줄것인가 하는 생각에 선뜻 결심을 내릴수 없었다.

그러던 송호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39(1950)년 6월 26일 방송연설에서 남조선괴뢰정부의 장병들이 우리 인민의 원쑤를 반대하여나섬으로써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사들의 대렬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데 대하여 하신 말씀에서 고무를 받고 그이의 품에 안기는 길만이 민족을 위한 참된 총대를 틀어쥐고 민족의 수호자로 사는 길이라는 결심을 굳게 가지게 되였다.

(결별하자. 미국의 예속군대이며 반민족적인 괴뢰군과 결별하자. 애국명장의 슬하에서 애국병졸이 된다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의 슬하에서 민족의 참된 수호자로 될것은 당연한 리치가 아니겠는가.)

송호성선생의 이 결심은 결코 어느 한 시기 일시적충동을 받아 생긴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60고개가 넘도록 군복을 입고 지내온 나날에 민족의 참다운 지도자의 령도를 받지 못하는 군대는 민족을 지키기는커녕 외세의 예속군이 되여 오히려 민족의 원쑤로 된다는것을 체험을 통해 간직한 깊은 신념의 뿌리에서 자란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용약 미제가 쥐여준 총대를 꺾어버리고 인민군대의 편에 돌아섰다.

공화국은 송호성선생의 애국적거사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민족수호의 참된 길,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길에 내세워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시기 인민군대안에 조직된 《해방전사려단》 려단장으로 된데 이어 반미구국투쟁동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조국해방전쟁승리에 기여할수 있었다. 그는 전후에도 공화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재북인사들인 오하영, 윤기섭,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선생들과 함께 6인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된 후부터 그 상무위원으로 사업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5(1956)년 5월과 그 이듬해 10월 등 여러차례에 걸쳐 재북인사들과 함께 송호성선생을 만나주시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도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고 진정한 애국자가 되려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이 맥박치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말씀을 심장에 새겨안고 송호성선생은 그후 민족수호와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길에 모든 힘과 정력을 다 바치였다.

이처럼 안아주시고 믿어주시고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겼기에 곽이영, 강태무, 표무원, 송호성선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의거장병들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자기의 참된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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