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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 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1권) 중에서 2.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 작성자 《구국전선》편집국 2013-03-04

 

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1권) 중에서

2.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조국통일은 성스러운 민족사적위업이다. 그것은 세계제국주의의 원흉인 미제와 직접 대결해야 하는 사생결단의 간고한 싸움이며 민족반역일당의 악랄한 도전을 짓부셔버려야 하는 준엄한 결전으로서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할줄 아는 사람, 그의 귀중함을 심장으로 체득하고 목숨으로 담보할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앞장에서 기발을 들고 개척해나갈 때 승리적으로 전진할수 있는것이다.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력사에는 이 땅우에 민족분렬의 비운이 드리우기 시작하던 첫 시기에 벌써 위대한 스승의 손길에 이끌려 이 력사적위업의 전위대오에 당당히 나선 통일애국투사들이 기록되여있다.

1947년 정초였다. 서울을 떠나 평양을 향해오는 한사람이 있었다. 남조선정국에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하며 통일애국의 길을 걷는 성시백이였다.

그는 조국강토가 두동강이 나게 될 민족최대의 불행이 닥쳐오자 오직 김일성장군님께서만이 이 난국을 타개하실수 있다는 확신을 간직하고 이보다 앞서 평양에 와서 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녔었다.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뵙게 된 그날 그는 수령님의 비범한 예지와 천리혜안의 통찰력, 특출한 령도적수완과 인간적풍모에 매혹되여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통일위업에 한몸바칠 결심을 품고 서울로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열혈청년시절에 조국해방의 성전에 한몸바칠 각오로 고향을 떠난 그는 한때 상하이림시정부에 들어가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여 여러해나 옥중생활도 하였다.

그 나날에 그는 백두산에서 조국해방의 총성을 높이 울리시는 항일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으면서 그이를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흠모하게 되였다.

그렇듯 흠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통일위업에 헌신하던 그는 다시금 그이를 만나뵙기 위해 평양으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바로 그날은 겨울추위도 어느덧 숨을 죽이던 2월 어느날이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성시백을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그의 건강부터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였다고 하였는데 오는 길에 그곳을 지나오면서 왜 집에 들려 가족들을 만나보고 오지 않았는가고, 성동무가 고향을 떠난지 20년도 넘었겠는데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워하겠는가고 그를 가볍게 질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그를 접견하신 자리에서 미제침략자들에 의하여 민족의 자주권이 여지없이 짓밟히고있을뿐아니라 종파분자들의 파벌싸움으로 인하여 민주세력이 통일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있는 남조선땅에서 모든 애국투사들이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해나가는데서 깊이 간직해야 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그는 암흑속에 비쳐온 광명을 본듯 환희와 격동을 금치 못하면서 그이께 이렇게 말씀올렸다.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고보니 앞이 확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힘껏 싸우고싶은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든것만 같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척 기뻐하는 그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백전로장도 말을 타고 장검을 들어야 이길수 있다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룡마와 장검만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에 장검을 들었다 하더라도 지략이 없으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옛말에도 힘센 장수와 지혜를 가진 장수가 겨루어 결국 지혜를 가진 장수가 이겼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지략이 없으면 말도, 칼도 맥을 못 춥니다.

지략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만이 세울수 있습니다.》

그이의 이 뜻깊은 말씀에 접하는 순간 그는 말로는 이루 표현할수 없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얼마후였다. 그가 들어있는 숙소를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통일애국성업에 자기의 모든것, 삶도 가정도 다 바쳐갈 불같은 맹세를 다지는 그를 따뜻이 고무해주시며 《성동무,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성동무가 담배를 좋아한다는데 물부리를 하나 마련하였다고 그리고 이 시계는 내가 쓰던것인데 기념으로 동무에게 주려고 한다고 하시며 소중히 간수하고있던 상아물부리와 애용하시던 회중금시계를 그에게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그와 헤여지기에 앞서 고향의 부모처자들이 기다리고있겠는데 들어올 때에는 그냥 들어왔지만 나갈 때에는 꼭 만나보아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그가 떠날 때에는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성시백이 부모들을 만나게 될 일에 대해서까지 마음쓰시여 친히 마련하신 고급양복천과 비단옷감을 비롯한 갖가지 생활필수품들과 특산식료품들이 들어있는 큰 트렁크를 보내주시였다.

스스로 자기를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로 간주하고있은 성시백은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고 영어, 중어, 프랑스어로 된 화보 《해방조선》과 《조국통신》을 발행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에 배포함으로써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을 해내외에 널리 선전하였으며 분렬주의자들의 매국적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미제와 그 주구들이 어떻게 하나 중간세력을 저들편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온갖 책동을 다하는데 대처하여 그는 중간 정당, 단체들을 반미자주통일을 위한 통일전선대오에 결속시키기 위한 사업에 모를 박았다.

결과 당시 남조선의 중간정당, 단체들가운데서 제일 영향력이 강했던 근로인민당을 비롯한 5개 정당중 4개 정당을 통일전선에 합류시키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개 정당만은 잘 따라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정당의 한 상층인물때문이라는것을 알아낸 성시백은 어느날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나는 일구이언하며 표리부동하게 행동하는 당신이 어떻게 되든말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소. 더구나 나라를 동강내려는 반역의 무리들을 찾아다니는 당신과 같은 사람하고는 두번다시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댔소. 그러나 오늘은 나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김일성장군님의 대표로 당신을 만나러 왔소.》

이날 그 인물은 집권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와 민족앞에 큰죄를 지을번 하였던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고 나라의 통일위업에 전심할것을 다짐하였다.

이렇듯 그는 김일성장군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적극적인 통일전선활동을 전개하여 처음에는 5개 정당을, 다음에는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를 그리고 그후에는 중간 및 우익정당, 단체들까지 통일전선에 망라시켜 13정당협의회를 결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1947년 10월에 미제가 우리 인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고 11월에는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라는 분렬도구를 조작한것과 같은 정세에 대처하여 우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범죄적책동을 신문과 출판물들을 통하여 폭로단죄하는 한편 서울에 기여든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분렬과 혼란에 빠뜨려 맥을 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지자, 동정자들을 포섭함으로써 회의때마다 의견이 대립되고 그 어떤 문건 하나도 전원찬성으로 가결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13정당협의회에서 유엔림시조선위원단문제를 토의하고 유엔총회의 의장앞으로 항의문을 보내여 유엔의 헌장에 맞게 국제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 용의가 있다면 조선인민의 일치한 요구대로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지체없이 끌어내가야 한다는것을 단호히 요구하도록 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과 규탄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밖으로부터 얻어맞고 내부로부터 와해되여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였으며 미제의 골치거리로 되고말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그의 이러한 투쟁소식을 들으시고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성동무가 이번에 큰일을 하였다고, 그는 재간도 있고 무슨 일이든지 결심하면 꼭 해내고야마는 사람이라고 거듭 평가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성시백은 4월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백범 김구를 돌려세우는 사업에도 큰 힘을 넣었다.

사실 그와 김구선생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그 사연인즉 상하이림시정부의 간판을 달고 프랑스조계지안에 있던 김구선생을 비롯한 림정사람들이 일제놈들의 강박에 굴복한 프랑스총령사의 지시에 따라 조계지밖으로 나가게 되였을 때 성시백이 재치있는 문필활동으로 그들을 내쫓지 못하게 한것이였다. 조계지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일제특무들에게 체포되여 목숨을 잃을번 하였던 그들에게 있어서 성시백은 생명의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이런 관계로 하여 김구선생은 성시백을 무시 못할 처지에 있었다.

《…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오시는분인데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옵는것이 어떤가 하는것입니다. 최근에 이북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자주력량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개최할데 대한 제의를 내놓았는데 이 거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입니다.》

김구선생은 자기를 찾아와 하는 성시백의 이러한 허심탄회한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와할리야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시백은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여 북행을 하시는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장군님과 마주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장군을 신봉하고있군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은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였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선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이 직접 전달하도록 하게 하시였다.

성시백은 즉시 그의 집으로 찾아가 자기가 김일성장군님의 특사임을 밝히고 수령님께서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81(1992)년 12월 어느날 이때에 있은 일을 회상하시면서 1948년 4월남북련석회의때 성시백의 활동이 컸다고 하시며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신 후 《나는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후 남북련석회의대목에 성시백의 활동내용을 적어넣으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남조선잡지 《신동아》 2010년 6호에서도 《김구선생을 설득해 남북련석회의에 참석케 한것도 빼놓을수 없는 성과이다.》라고 성시백의 활동공적을 전하였다.

그는 1948년 가을부터 《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 그리하여 《국회》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쟁취하는데 성공한 그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반동세력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인민들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안겨주었다.

그의 《국회》공작에 반동세력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남조선의 《대한년감》(1975년)은 이렇게 썼다.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이였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정권을 흔들어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색되여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갔다.》

이처럼 살벌한 남녘땅에서 통일애국투쟁을 과감무쌍하게 벌려나가던 성시백은 1950년 5월 15일 오후 4시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성시백은 남조선전체를 쥐고 흔들었는데 박헌영의 패가 밀고하였다고 가슴아프게 회고하시였다.

미제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은 한때 남로당의 요직에까지 있다가 투항변절한 자기 졸개들을 시켜 성시백을 적들에게 밀고하여 체포하게 함으로써 천추를 두고 용서할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던것이다.

파쑈교형리들은 성시백을 굴복시키기 위해 형언할수 없는 악형과 야만적인 고문을 하루에도 여러차례씩 들이대였고 또 끈질긴 회유와 유혹도 계속하였다. 하지만 성시백의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꺾지 못하였으며 또 꺾을수도 없었다. 파쑈교형리들은 1950년 6월 9일 륙군형무소에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성시백은 이때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살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다진 통일애국의 그 맹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가 최후를 마친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직전인 1950년 6월 27일 5시였다.

성시백의 희생에 대한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으시여 관계일군에게 거듭 확인하시였다.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또 확인하시였으나 대답은 매번 같았다.

그토록  믿고  사랑하시던  통일애국투사를  잃으신  크나큰 비분으로  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시며 창너머 남쪽하늘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가다니, 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있었더라면라고 하시고는 끝내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의 시체를 꼭 찾아내야 하겠다고 명령하시였다.

그런데 성시백의 존재를 무서워하던 적들은 그의 시신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지나갔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으시고 어느해에는 사람들을 만나보던중에 성시백이와 같은 재간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시였고 또 어느해에는 우리모두 성시백이와 같이 통일을 위하여 싸우자고 말씀하시였다.

진정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빛발속에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자랑스러운 생의 흔적을 뚜렷이 새긴 성시백은 조국통일을 위한 영광의 대오에서 오늘도 고귀한 삶을 빛내여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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