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2) 시련의 나날에 찾은 길
□ 인민의용군에 탄원하여
미제의 직접적인 조종밑에 오래전부터 공화국을 침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온 리승만도당의 괴뢰군대는 1950년 6월 25일 이른새벽 38°선전역에 걸쳐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대는 적들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즉시 결정적인 반공격을 개시하여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고 남반부의 여러 지역들을 해방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남반부해방지역에 공화국의 인민정권들이 조직되고 제반 민주개혁들이 실시되였다.
40여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반인민적인 통치밑에서 신음하면서 진정한 조국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절감한 남반부해방지역의 수많은 애국적인민들은 인민군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을뿐아니라 손에 총을 잡고 인민군대와 함께 적을 격멸소탕하는 전투에 참가할것을 열렬히 희망하여나섰다.
이러한 남조선인민들의 열렬한 지향과 요구를 헤아리시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지역의 애국적인 청년학생탄원자들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인민의용군은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남반부애국청년들의 자원적인 무장조직입니다. 그러므로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을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하여 싸우려는 애국적인민들의 아들딸이면 누구나 인민의용군에 참군할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해방된 남반부각지의 애국적로동청년들과 농촌청년, 청년학생들은 공장과 농촌, 학교들에서 궐기대회들을 열고 앞을 다투어 의용군에 입대할것을 탄원하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된 다음날인 1950년 6월 29일 280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전선에 탄원한데 이어 7월 2일과 3일사이 서울에서만도 1만 6 000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전선에 탄원하였다. 개성, 춘천, 주문진 등 해방지구의 청년학생들도 의용군에 입대할것을 용약 자원해나섰다.
청년학생들뿐이 아니였다. 1950년 7월 1일부터 6일까지의 사이에만도 서울시안의 많은 직장, 공장들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수만여명의 청년들이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7월 6일 2 000여명의 철도로동자들의 참가밑에 진행된 서울지구 철도로동자궐기대회에서는 《서울시로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수많은 로동자들이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7월 10일 서울시안의 여러 공장의 남녀로동자 2 000여명은 궐기회의를 열고 전원이 의용군에 입대할것을 자원하였다.
이렇게 청년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된 전선탄원운동은 점차 대중적인 운동으로 급속히 확대발전되여 1950년 8월 15일까지 남조선의 해방지역들에서는 무려 수십만명의 애국적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탄원해나섰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던 전 오스트랄리아 기자 월프리트 버체트는 자기가 쓴 책 《이 기괴한 전쟁》에서 이 경이적인 사실에 대하여 《전투(조국해방전쟁)가 시작된 최초의 6주사이에 120만명의 청년남녀들이 조선인민군 지원병부대 또는 빨찌산부대에 지원하였다. 그가운데 40만명은 남에서 온 사람들이였다.》라고 썼다.
그들가운데는 김성진영웅도 있었다. 그는 참된 행복을 보장해주는 진정한 삶의 요람에 안기지 못하였을 때 얼마나 비참한 운명의 길을 헤매이게 되는가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김성진(1932. 10. 16-2009. 3. 2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주체39(1950)년 7월 의용군으로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인민군대에서 오래동안 정치일군으로 사업.
남조선강원도 홍천의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9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일제의 《보국대》로 끌려나가자 살길을 찾아 어머니와 함께 탄광으로 옮겨와 힘겨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배고파 우는 동생을 업고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가 일제의 십장놈에게 매를 맞기도 하였고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소나무껍질을 벗기기도 하였다.
이러하던 그에게 있어서 일제의 패망은 커다란 감격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였으니 농사도 짓고 마음껏 배울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고향땅에 찾아왔건만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그와 그의 아버지는 또다시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착취자들에 대한 원한과 함께 자기들도 언제면 제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지어볼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의 이러한 소원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대에 의하여 고향마을이 해방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공화국정부에서는 지난날 땅 한뙈기 없이 고생하던 그의 집에도 수천평의 논과 밭을 분여해주었다.
이렇듯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공화국정권이야말로 지지리도 못살던 자기 가정에 행복을 안겨주는 진정한 삶의 품이라는것을 확신한 그였기에 남먼저 의용군으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던것이다.
그는 전투마다에서 언제나 용감히 싸웠다.
1953년 1월 어느날 어느 한 고지습격전투에서 적의 중기화점에 의하여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자 그는 서슴없이 적화구를 가슴으로 막고 중대의 돌격로를 열어놓았다. 적화구를 막는 순간 그의 가슴으로 11발의 적중기관총탄알이 뚫고나가면서 파헤친 상처는 매우 참혹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아직 살아있었다.
의식을 잃은채 병원에 후송된 그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있던 시기 적화구를 가슴으로 막은 전사가 아직 살아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급히 유능한 의료일군들을 그곳으로 파견해주시였으며 부대장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전사를 꼭 살려내야 한다시며 할수 있는 대책을 다 취해주시였다.
그 사랑은 그대로 죽음을 이겨내는 힘이 되여 며칠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고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회복을 위해 인삼을 비롯하여 몸을 빨리 추켜세우는데 특효가 있는 여러가지 보약들도 보내주시며 완쾌되도록 온갖 조치들을 다 취해주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였다.
주체42(1953)년 6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김성진영웅을 만나주시였다.
감격과 흥분으로 하여 변변히 인사도 못 올리는 그를 한품에 안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잘 싸웠다고, 용감히 싸웠다고, 이렇게 만나니 참 기쁘다고 하시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시고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어주시였다.
그러시다가 그가 부상당했던 자리를 다정히 쓸어보시며 《이렇게 손을 대면 아직두 아프지. 숨쉬기두 괴롭구.》라고 물어주시였다.
그 사랑에 북받쳐 격정의 눈물을 흘리는 그를 이끌어 의자에 앉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시다가 《내가 보기엔 아직도 몸이 회복되지 않은것 같소.》라고 하시며 완쾌되지 못한 그의 건강상태를 놓고 못내 걱정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을 더 안정하는게 좋겠다고,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하시며 몸조리를 더 잘하고 건강해진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따뜻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로부터 얼마후 그를 또다시 만나주시고 몸은 좀 어떤가고, 퍽 건강해보인다고 하시며 만족해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고향은 어디고 거기서 어떻게 생활하였는가도 하나하나 물어주시였으며 점심식사도 함께 하시는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와 헤여지기에 앞서 거듭 건강하여 공부를 잘하라고 하시면서 귀중한 선물까지 안겨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여러차례 그를 만나주시면서 건강한 몸으로 애국의 총대와 함께 한생을 빛내이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하기에 언제인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김성진영웅을 만난 이전 쏘련 붉은군대의 한 기자는 흥분하여 자기네 나라에서도 전쟁때 화구를 막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없다, 그때 누구도 그들을 살릴 생각을 못했다, 오직 김일성주석께서만이 그런 기적을 창조하시였다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절세의 위인의 이런 위대한 사랑의 품이 있어 그는 1960년대에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이래 인민군대에서 오래동안 정치일군으로 사업하였으며 머리에 흰서리를 얹고서도 조선인민군 장령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한평생 군복을 벗지 않았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위훈을 떨친 사람들중에는 양판기영웅도 있다.
전라남도 고흥에서 나서자란 그는 7살 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할수없이 지주집 머슴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만은 어떻게 하나 꼭 공부를 시키기 위해 궂은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처럼 애를 썼건만 아들은 월사금을 내지 못한 《죄》로 끝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해방후에도 그의 가정형편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어느 한 공장에 들어간 그는 하루 10∼12시간씩 힘든 로동을 강요당하였으나 차례지는것은 천대와 멸시뿐이였다.
그리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하여 고향땅이 해방되자 그는 피눈물나는 생활을 다시는 되풀이할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손에 총을 잡았다.
수많은 전투들에서 무비의 위훈을 세운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으며 그는 정전직후인 주체42(1953)년 8월에 진행되였던 전국전투영웅대회를 비롯한 많은 대회들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생 군복을 입고 총대와 함께 삶을 빛내이였다.
보람찬 군사복무의 길에서 양판기영웅은 조선인민군 장령으로 성장하였으며 오늘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서 후대들에게 조국의 귀중함을 새겨주고있다.
언제나 가정의 행복과 나라의 운명을 하나의 맥락에서 보시며 준엄한 전시의 환경에서도 한 가정의 운명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품이 있기에 평범한 인민군전사였던 유기홍영웅의 삶도 참답게 빛나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항상 가정의 행복과 나라의 운명을 하나의 맥락에서 보아왔다. 나라가 역경에 처하면 가정도 편안할수 없으며 가정에 그늘이 지면 동시에 나라의 표정도 어두워진다는것이 우리의 지론이였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우리는 한 전사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적구에 한개 련대의 병력을 파견하는 전쟁사상 류례없는 조치도 서슴없이 취할수 있었다.》
주체40(1951)년 11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한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께 싸우는 전사들의 높은 전투사기에 대하여 보고드리다가 한달동안에 적비행기 5대를 쏴떨구고 공화국영웅이 된 한 인민군전사의 가족이 적후에 있다는것을 말씀올리였다. 그 인민군전사가 바로 유기홍영웅이였다.
유기홍영웅의 고향은 전쟁전 38°선너머에 있던 개성이였다. 그의 가족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는 물론 해방후에도 미제와 그 주구들의 통치밑에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러던 그의 집에도 새 생활의 기쁨은 찾아왔다.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대에 의하여 고향이 해방되자 인민정권은 그의 집에도 수천평의 땅을 무상으로 분여해주었던것이다.
유기홍영웅은 자기들에게 새 삶의 기쁨과 희열을 안겨준 고마운 그 품을 지키기 위해 의용군에 입대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의 보고를 받으시고 자기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준 참된 삶의 품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에 자원하여 떨쳐나섰던 남반부인민들을 생각하시는듯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였다.
그러시다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달동안에 적기를 5대나 쏴떨구었으면 대단하다고 하시며 그런 영웅이 한 200∼300명만 나오면 미국놈들이 《공중우세》는커녕 비행기밑천까지 다 말리우게 될것이라고, 그 동무가 정말 잘 싸웠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잠시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어려운 전쟁을 하고있기는 하지만 영웅의 가족을 적구로부터 구출해와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련대를 동원하여 그의 가족을 데려올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가족을 데려오는것은 우리 지휘관들의 의리라고 하시면서 오늘 우리 인민군군인들은 당과 조국을 보위하고 자기의 부모처자들과 형제들의 행복을 위하여 피흘리며 싸우고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초기에도 적지 않은 동무들이 부모형제들을 적구에 두고있었는데 무장한 대원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가족을 유격구로 데려오게 하였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웅동무의 가족을 적구에서 반드시 구출해와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리하여 일찌기 세계전쟁사가 알지 못하는 《가정구출작전》이 펼쳐지게 되였다.
당시 유기홍영웅의 가족은 아들을 인민군대에 내보낸것으로 하여 미제와 그 주구들의 행패를 무시로 당하군 하였다. 그런데다가 열병까지 겹치여 그의 가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있었다.
적후에서 고생하고있는 한 평범한 전사의 가족을 위하시는 절세의 위인의 뜨거운 사랑에 떠받들리여 전투기술기재들이 움직이고 전투원들이 은밀히 기동하기 시작하였다. 적진을 뚫고들어가 종심 20리 지경을 봉쇄한 련대는 짧은 시간에 그의 가족들이 있는 마을일대를 장악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기홍이가 왔어요! 인민군대가 왔어요!》
《기홍이라니?! 김일성장군님의 군대가 왔단 말이냐!…》
적후의 어둠속에서 찾고 대답하는 목소리, 련대무력의 엄호하에 집으로 찾아온 아들과 적후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의 감격적인 상봉…
인민군전투원들은 집세간들을 모조리 찾아 마차들에 실었다. 그리고 논밭에 서있던 곡식단들까지 한짐씩 졌다.
이처럼 옹근 한개 련대의 무력이 동원되여 어려운 전시환경속에서 영웅전사의 혈육들과 집세간 하나 버림이 없이 모조리 싣고 전선을 넘어서는 사랑의 전설이 펼쳐지게 되였다.
당시 여러 나라 통신들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한개 련대를 풀어 병사의 가족을 적구에서 구출》, 《세계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일》, 《일개 병사를 더없이 귀중히 여기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전쟁의 승리는 북조선의것》이라는 표제를 달고 전파를 날리였다고 한다.
구출작전의 성공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웅의 가족들이 안전한 곳에서 생활할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인민정권기관에서는 전선을 넘어온 그의 가족들에게 5칸짜리 기와집을 배정해주었으며 5 500평의 땅을 분여해주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마음껏 배울수 있는 학교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유기홍영웅과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분여받은 땅에서 농사를 잘 짓는것이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가 첫해농사를 잘 짓고 감사의 편지와 함께 여러 가마니의 애국미, 전선원호미를 삼가 올렸을 때에는 그 편지도 보아주시고 회답편지까지 몸소 보내주시였다. 또한 주체42(1953)년 8월에 진행된 전국전투영웅대회에 유기홍영웅과 그의 아버지도 참석시켜주시고 연회석상에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시여서는 적후에서 고생이 많았겠다고, 이제는 좋은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시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자신과 가족들까지 모두 한품에 안아 참된 삶의 행복을 안겨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사랑의 품이 있어 유기홍청년도 공화국영웅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조선인민군 장령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이들뿐이 아니라 심광국, 리남철, 김범진, 오길봉, 김명수, 리기수, 김주훈, 김룡택, 박기평, 김원태, 주상하, 김정식, 김동수 등 수많은 의용군출신의 인민군전사들이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 싸워 전투위훈을 세우고 공화국영웅이 되였으며 전후 인민군대의 핵심골간으로 사회주의건설의 여러 분야에서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활짝 꽃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