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2) 인민의용군에 탄원하여
□ 서울에서 만포까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은 어지러운 남조선정국에 몸을 잠그고 정쟁의 난파에 부대끼던 각이한 리념과 주의주장을 가진 정계인사들로 하여금 자기의 정치적견해와 리해관계에 따른 운명의 선택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이 땅에서는 지나온 경력도 다르고 주의주장도 정치리념도 다른, 지어 나라와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진 사람들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북행길에 오르는 류례없는 일이 펼쳐졌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이미 리승만도당은 다 부산으로 쫓겨간 뒤였지만 그곳에는 많은 남조선정객들이 남아있었다. 그들가운데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등 상해《림시정부》에 관여하였던 민족주의인사들도 있었고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구출된 황윤호, 김병회, 김옥주, 최태규, 김약수 등 소장파《국회의원》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민족분렬정책에 적극적으로 추종하다가 미처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데로부터 그들의 정치적견해는 각이하였고 공화국정권과 인민군대에 의한 서울해방을 대하는 립장과 자세도 각이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7월초 일군들에게 서울에 남아있는 정객들이 대부분은 남북협상파정치세력으로서 량심적인 인사들이며 일부는 중립적인 립장에서 대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그들의 과거를 물을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등진 길에서 구원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들의 대부분이 년세도 많고 일부 건강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잘 돌보아주어야 하겠다고, 전시환경이지만 쌀도 넉넉히 공급하고 고기, 우유, 기름을 떨구지 말고 공급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이 담겨져있는 말씀을 전달받은 서울의 애국적인사들과 정치인들은 고마움에 목이 메여 눈굽을 찍었다.
조소앙(1887. 4. 8-1958. 9. 10) 사회활동가
해방후 서울에서 《비상국민회의》 의장, 남조선《과도립법의원》 의원 등을 력임. 사회민주당 당수로서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 참가.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와 주체45(1956)년 7월부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사업. 조국통일상수상자.
그들은 전쟁승리에 자기들의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할 결심을 안고 서울에 남아있던 정치인 및 《국회의원》들로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윤기섭, 김의한, 조시원, 장건상 등 《림정》계애국인사들과 류동열, 송호성 등 《림정》계의 이전 남조선괴뢰군 장성원로들, 서울해방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소장파《국회의원》들, 《서울잔류파》로 불리우는 초대, 2대《국회의원》 등 서울에 남은 학계, 사회계인사들 수십여명이 망라되였다.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의 결성!
이것은 남조선의 애국적인사들과 정치인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참된 애국의 길에 나선다는 일치한 결의의 표명이였고 우리 민족을 무참히 살륙하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미제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투쟁에 나선다는 힘찬 선언이였다.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성원들은 자기들이 결의한대로 준엄한 전시환경이였지만 방송과 신문을 통해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을 규탄하는 성명서, 담화, 호소문 등을 발표하여 전쟁승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인민군대의 노도와 같은 진격앞에 패전을 거듭하던 미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지없이 나떨어진 저들의 위세를 추세우며 공화국을 기어이 강점하려고 발악하였다.
미제는 1950년 9월 중순 태평양방면에 배치하였던 저들의 륙해공군 총병력과 지중해함대의 일부 그리고 미본토의 지상군과 추종국가군대까지 모두 합쳐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조선전선에 더 들이밀었다. 미제는 증강된 대병력으로 락동강계선에서 《총공세》를 시도하는 한편 9월 중순 5만명의 대병력과 수백척의 함선, 약 1 0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나섰다.
급변하는 정세는 이 땅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오고있음을 예고해주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성원들은 공화국의 품을 찾아오려는 자기들의 희망을 피력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시여 주체39(1950)년 9월 17일 일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시였다.
《현재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이름있는 여러 애국적정계인사들이 우리 공화국정부를 지지하여 평양에 들어올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소망대로 평양에 무사히 들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미군병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서울일대에 위험한 정세가 조성되고 거기에 있는 남조선애국적정계인사들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남조선정계인사들을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그들이 적들에게서 박해를 받고 참살당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최동오, 엄항섭선생을 비롯한 애국적인사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 애국인사들을 평양으로 데려올 때 서울에 있는 안재홍, 오하영선생을 비롯하여 입북의사를 표명한 《국회의원》들과 리승만괴뢰도당에게 체포투옥되였던 전기 《국회》의 《소장파의원》들도 다 데려와야 하겠다고, 그들은 한때 친미반공의 일선에서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리승만괴뢰도당과 결별하고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시고나서 이렇게 계속하시였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이 비록 우리와 정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소중히 여기고있습니다. 지난날 반공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손잡고나가자는것이 우리의 일관한 립장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들을 불러주시였다는 소식에 접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의 가슴은 감격과 환희로 설레이였다.
(아, 고금동서 그 어디에 생사를 판가리하는 전시에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닌 최고사령관이 과거가 아름답지 못한 정객들, 전쟁수행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짐이 될 고령의 정객들에게 그리도 관심을 돌리며 생사존망의 위기에서 구원해준 실례가 있었던가!)
이런 생각속에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눈시울을 적시였다.
《겨울이 사나워도 새봄은 반드시 오는 법이다. 지금 미국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김일성장군님만을 믿고 따르는 우리 민족의 힘을 당하지 못한다. 그이를 따르는 길에 우리 민족의 앞날이 있고 우리의 미래도 있다. 가자!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절대적인 흠모심이 그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참다운 길, 우리 민족이 번영하는 길은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뿐이라는 확신을 더해주었고 그들을 그 길에로 떠밀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안재홍, 윤기섭, 오하영, 송호성, 김의한, 김경배, 백상규 등 인사들과 정치인 및 《국회의원》들, 황윤호, 김병회, 김약수, 김옥주, 최태규 등 소장파《국회의원》 수십여명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만을 따르는 길에 민족의 번영과 매 개인의 참된 삶의 가치가 있다는 정치적신념,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는 길만이 자기가 살고 민족이 사는 길이라는 스스로의 자각과 판단으로 서울을 떠나 북행길에 오르게 되였다.
아마 이들에게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세심한 입북조치가 없었더라면 며칠을 못가 미제와 리승만도당에게서 첫번째 색출대상으로 점찍혀 체포, 투옥, 고문, 학살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명백했다.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9월 28일 서울에 다시 들어온 때로부터 그 이듬해 1월 4일까지의 기간에만도 이른바 《부역자처단법》(인민군대를 환영하고 협조한 애국자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단한 파쑈악법)에 걸어 무려 7만 2 390여명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학살한 사실이 이를 더욱 명백히 해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정계인사들이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폭격이 덜한 평양시교외에 그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여 그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정작 공화국의 품에 안긴 남조선정객들이였지만 내심은 여러 갈래로 복잡하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였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선생들을 비롯한 민족주의계렬의 애국인사들은 평양에 도착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다. 반면에 전 《민정장관》 안재홍, 그리스도교 목사 오하영선생을 비롯한 인사들과 황윤호, 김병회 등 소장파《국회의원》들은 또 그들대로 이제 김일성장군님께서 남북련석회의에도 참가하지 않은 자기들을 어떻게 대해주실것인가 하는 위구심으로 가슴을 바재이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날 친미반공세력에 속해있으면서도 한가닥 민족적량심을 버리지 않고있다가 조선전쟁을 도발한 미제와 리승만역도와 결별하고 서울에 남아 공화국정권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던 2대 《국회의원》들은 《오로지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의 관대하신 은총만을 믿을뿐이요.》라고 하면서 대세를 관망하는 태도를 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헛된 위구였고 공연한 걱정이였다.
애국과 매국이 첨예한 판가리를 하는 준엄한 마당에서 용약 애국의 편, 민족의 편, 자주의 편으로 넘어온 이들의 장거를 소중히 여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소한 차별이나 간격도 없이 그들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고 전시의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남조선정계인사들이 평양에 들어온지 며칠후인 9월 25일, 그들은 뜻밖에도 추석명절연회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선지휘로 그 바쁘신 속에서도 외지에서 추석명절을 맞는 그들을 생각하시여 이채롭고 풍성한 연회상을 특별히 마련하여 보내주시였던것이다.
그 추석명절연회상을 마주한 남조선정계인사들은 목이 꽉 메여 창밖의 먼 하늘가로 생각이 실린 눈길을 던졌다.
낮이면 적기에 시달리던 평양의 하늘가에 어느새 놋대야같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상처입은 대지를 어루쓸며 애무했다.
예로부터 타향살이인생들에게는 뇌리에 박힌 진득한 향수까지 불러낸다는 추석날의 보름달이였지만 그날의 보름달은 정든 고장을 떠나온 남조선정객들에게서 애틋한 향수에 앞서 자기들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경모와 숭배, 고마움만을 불러냈다.
하기에 김규식선생은 뜻깊은 연회석상에서 이렇게 자기의 감정을 토로하였다.
《…나는 일생에 서울에서는 물론 중국과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큰 연회에 많이 참가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추석명절연회와 같이 뜻깊고 크나큰 은정이 담긴 연회는 처음입니다. …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신 장군님께서 우리 남조선정계인사 및 <국회의원>들을 위해 이처럼 성대한 연회까지 차려주도록 하시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들의 어지러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구원의 한품에 안아주시였습니다. 실인즉 김일성장군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지 않았던들 우리들은 다 죽었을것입니다!
…
여러분! 이렇게 놓고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재생의 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적생명만이 아니라 정치적생명까지 구원해주신 위대한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를 자기들의 절대불변의 신념을 담아 서로서로 잔을 찧으며 《김일성장군 만세!》를 심장으로 높이높이 불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특별렬차까지 보내주시여 그들이 만포까지 무사히 들어오도록 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의 품을 찾아 만포까지 들어온 남조선정객들이 안전한 곳에서 마음놓고 생활하도록 신변과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정객들이 들 숙소들에 침대를 놓기로 했을 때 나이든분들에게는 침대보다 온돌방이 더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장판을 잘하고 불을 뜨뜻이 때서 로인들이 아무때나 누워 허리를 지질수 있게 해주라고 당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그들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안심하시며 정세가 어렵고 복잡하며 부족한것이 많다고 하여도 우리를 찾아온 사람을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해당 기관들에 이야기하여 만포까지 후퇴하여온 남조선정객들의 생활에서 불편이 없도록 대책을 세우게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로인들의 몸보신에는 소고기가 더 좋다고 하시며 늘 소고기를 떨구지 않도록 해주시고 겨울에 비타민C가 부족할수 있다시며 신선한 과일과 남새도 자주 보내주시였다. 또한 년로한분들에게는 바지저고리가 더 편하다고 하시며 조선옷일식을 만들어 보내주기도 하시였다.
특히 김규식선생에게 베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김규식(1880. 12. 28-1950. 12. 10) 애국지사
해방후 서울에서 남조선《민주의원》 부의장, 남조선《과도립법의원》 의장 력임. 남조선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조직. 그후 《좌우합작위원회》를 《민족자주련맹》으로 개편하고 《5. 10단선》반대운동을 전개. 주체37(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 참가. 조국통일수상자.
김규식선생은 나이가 많은데다가 원래 신병으로 몸이 허약하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초청을 받고 주체37(1948)년 4월에 열렸던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들어왔을 때 몸이 불편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새로운 반공격을 준비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김규식선생의 건강에 대하여 마음쓰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10월말 어느 한 의료일군에게 남반부에 있던 김규식선생이 후퇴하여 만포에 와있다고,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를 지지하였고 서울에서부터 후퇴하여 만포까지 우리를 따라온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그가 후퇴하여 먼길을 오느라고 고생한데다가 원래 병이 있고 나이가 많아 매우 불편해하니 동무가 가서 진찰하여보고 치료를 잘해주어야 하겠다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1월 1일 김책부수상에게 주신 지시에서 김규식선생은 민족적량심과 의리가 있는 애국인사이라고, 그는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때에는 병약한 70고령의 몸으로 이곳에까지 불원천리하고 우리를 따라왔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김규식선생은 비록 고령이지만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야 할분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건강한 몸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성업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도록 치료를 잘해주어야 합니다. 특별병원 원장에게 지시하여 김규식선생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대책을 철저히 세우며 선생의 건강과 장수에 좋은 여러가지 보약과 필요한 약품들을 다 써보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북부지대의 날씨가 몹시 찬것만큼 김규식선생의 숙식과 생활전반에 깊은 관심을 돌려 그가 사소한 불편도 없이 지내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규식선생을 병원에 입원시켜 집중적인 치료를 받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거듭되는 은정에 감복한 김규식선생은 생의 마지막순간에 자기의 격정을 이렇게 터쳤다.
오호라!
위대하도다 현명하도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이내 인생을 구원해주셨소
이 한몸 죽은들 천만년 잊을손가
자애깊으신 김일성장군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12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일군들에게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을 비롯한 중앙급신문들에 김규식선생이 중환으로 치료를 받던중 별세하였다는 부고를 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책임일군들에게 김규식선생은 좋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원을 붙여주었고 많은 약을 썼으나 오랜 중환으로 하여 그는 끝내 사망하였다고,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고, 그가 조국이 통일되는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것이 애석하다고 가슴아파하시면서 나가서 장례를 잘해주고 우리가 다시 평양으로 나가면 그때 묘지를 옮겨가자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각부수상으로 있던 홍명희선생을 전화로 찾으시여 선생은 김규식선생과 오랜 지기인데 장례에 참가해달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할분인데 아깝게도 사망하였습니다.
김규식선생은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파쑈폭압밑에서도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량심적인 민주인사입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놈을 따라간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왔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우리를 따라 서울에서 만포까지 들어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처럼 크나큰 사랑과 은정에 의하여 전쟁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김규식선생의 장례식은 각계 일군들과 수많은 조객들의 참가하에 엄숙히 거행되였으며 그는 조국과 민족이 잊지 않는 애국지사, 애국렬사로 영생의 높은 언덕우에 오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남조선에서 들어온 인사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면서 그들에게 공화국정부의 정책과 국내외정세에 대해서도 제때에 알려주고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고 전후에도 그들모두를 조국과 겨레앞에 내세워 한생을 값있게 살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으며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빛나게 해주시였다.
서울에서 만포까지, 남조선정객들이 준엄한 시련의 나날에 걸은 이 길은 비록 어지러운 과거를 가지고있다 하더라도 력사앞에 지닌 자기의 사명감을 자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몸바쳐 나서는 사람이라면 그들모두를 너그러이 안아주고 삶을 빛내여주는 위대한 태양의 품을 찾아간 애국애족의 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