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2) 시련의 나날에 찾은 길
□ 북으로 향한 발걸음
나라와 민족앞에 엄혹한 시련이 닥쳐왔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북으로 발걸음을 다그치는 수많은 사람들가운데는 남조선의 애국적인 작가, 예술인들도 있었다.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한달남짓한 동안에 남반부령토의 90%이상, 인구의 92%이상이 해방되였을뿐아니라 도처에 진정한 인민의 정권인 인민위원회들이 수립되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들이 실시되는 놀라운 현실은 남조선의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의 심장을 세차게 격동시켰다.
그들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통치밑에서 고통받던 남반부인민들이 인민정권의 옳바른 시책으로 진정한 자유와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있는것을 목격하면서 특히는 지난날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한 문화예술을 창조하고싶어도 그것을 실현할수 없었던 자기들에게 진정한 창작활동의 길을 활짝 열어준 공화국정권의 고마움을 온몸으로 절감하면서 그 품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나섰다.
남조선의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은 100여명의 연극인, 음악가, 무용가들로 전선위문예술공작단을 뭇고 8월 15일 서울을 떠나 각 전선을 순회하면서 인민군용사들을 전쟁승리에로 크게 고무하였다.
시인, 작가들은 각 공장, 기업소와 학교, 농어촌들에 나가 해방지역 인민들을 위한 선전사업도 활발히 벌렸으며 일부 작가, 예술인들은 종군기자로 용약 전선에 출동하였다. 또한 인민군전투원들을 영웅적위훈에로 고무격려하는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여 전선에 보냈으며 애국적인 조각가, 화가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형상한 훌륭한 조각과 회화작품들을 내놓아 남반부인민들속에서 절세의 위인에 대한 흠모심이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도록 하였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참된 삶의 행복을 안겨준 그 품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길에 애국의 마음을 다 바치던 그들에게 준엄한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였던것이다.
(인민군대를 따라 북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남에 그냥 남을것인가?)
사실 이때 고향을 남반부에 두고있던 그들이 그곳에 남는다고 하여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이 갈림길에서 남조선의 애국적인 문화예술인들은 스스로의 신념과 의지에 따라 주저없이 북행길을 선택하였다. 진정한 자유와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정한 문화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도 공화국의 품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을 북행길로 떠밀었던것이다.
이렇게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 남조선의 애국적문화 예술인들속에는 소설작가였던 박태원선생도 있었다.
박태원(1909. 12. 7-1986. 7. 10) 작가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해방과 함께 군복을 입고 인민군대에 종군하면서 중편소설 《조국의 기발》과 단편소설 《조국의 품》 등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전후에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서 방송극을 주로 창작. 주체48(1959)년부터 다시 소설창작에 관심을 돌리고 3부작으로 된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창작.
1930년 잡지 《신생》 10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한것을 계기로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그가 문학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것은 자기가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 돌아와 문학창작의 붓을 든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는 이렇듯 불타는 열정을 안고 해방전 여러편의 소설작품들을 창작하여 내놓았다. 그러나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밑에서 그의 재능은 응당한 빛을 보지 못하였다.
해방을 맞은 그는 오랜 세월 외세에 의하여 짓밟혔던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줄 의로운 마음을 안고 력사소설들을 쓸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미제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매국이 판을 치는 남조선에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그의 소원을 이루어줄 품도 없었다.
어지러운 남조선사회에 대한 저주와 분노가 치솟을 때마다 그는 38°선을 넘어 결연히 북행길에 오른 작가, 예술인들을 생각하군 하였다. 그는 여러 기회에 그들이 북반부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창작활동을 마음껏 벌리고있다는 꿈같은 소식을 들어왔었다.
날과 달이 흐를수록 그의 가슴속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자그마한 애국의 마음도 귀중히 여기고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온갖 조건을 다 마련해주는 공화국의 품에 안기고싶은 간절한 생각이 소중히 자리잡게 되였다.
하기에 그는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남먼저 군복을 입고 인민군대에 종군할수 있었다. 그리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속에서도 추호의 동요없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줄 품을 찾아 북쪽으로 발걸음을 다그칠수 있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력사소설들을 창작해보려던 박태원선생의 평생소원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이루어질수 있었다.
그가 공화국에서 창작한 작품으로 알려진것은 장편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 2부)와 《갑오농민전쟁》(1, 2, 3부)이다.
오래전부터 력사물창작을 열망해온 박태원선생의 창작적환상에 날개를 달아주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문화유산은 어떻게 계승발전시켜야 하며 력사소설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 한다는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옛날의 계급투쟁을 취급한 소설도 쓸수 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여 계급투쟁이 없은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의 형식이 오늘과 다를뿐이지 노예주와 노예, 봉건령주와 농노사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런 계급투쟁들도 소설로 잘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례를 들어 어느 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다면 력사를 쓰듯 사실을 그저 라렬할것이 아니라 어떤 전형적인 개별적사람들의 투쟁을 통하여 그때 사회의 농민전쟁전반과 계급투쟁의 전모를 보여줄수 있게 그릴수 있을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에는 시대와 인민이 바라는 진정한 력사소설을 쓰려면 우선 작가자신이 력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력사적사건들과 현상들을 주체적인 립장에서 정확히 분석평가하고 예술적으로 일반화할수 있는 예리한 정치적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에 접한 박태원선생은 암흑속에서 광휘로운 빛발을 받아안은것처럼 눈앞이 확 트이는것을 느꼈다.
언제인가 그자신이 말한바와 같이 해방후까지만 하여도 그는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 포로되여 창작활동을 진행해왔었다. 그러다보니 력사적사실이 남긴 교훈과 진리를 인민대중에게 알려주는 참다운 력사소설을 창작하자면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는 남조선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외국의 력사소설도 읽어보고 문예론문도 뒤져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신통한 처방을 찾을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참다운 력사소설을 창작할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안고 고민해온 박태원선생이였기에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은 참다운 력사소설창작의 앞길을 환히 밝혀준 등대와도 같았다.
박태원선생은 우리 민족의 력사에 반봉건반침략투쟁으로 큰 자욱을 남긴 갑오농민전쟁을 통하여 력사적으로 인민대중은 사회적진보와 변혁을 이룩한 력사의 주체이며 지배계급은 흉악한 략탈자, 비렬한 매국배족의 무리라는것을 확증하는 력사의 증언으로 될 장편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창작사업에 달라붙었다.
그가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창작하던 나날은 절세의 위인들의 사랑과 은정속에 흘러온 나날들이였다.
한때 서울의 문학계에서는 박태원선생이 북에 들어가 《정치적박해》로 매우 불행하게 산다는 풍설이 돌았다. 지어 남조선의 어느 한 출판물은 공화국에 들어온 박태원선생이 《숙청》되였다고까지 썼다.
그러나 박태원선생은 그 어떤 《숙청》이나 《박해》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질병때문에 고생하였다.
이전부터 시력이 좋지 못하였던 박태원선생은 이 소설창작을 준비하던 때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였다. 수많은 력사자료들을 보아야 할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심장이 뛰는 한 절대로 창작을 멈출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읽어주는것을 통하여 사료를 습득했고 불러주는 방법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을 못 보는 박태원선생이 자기 안해에게 불러주는 방법으로 소설을 창작하다가 불치의 병으로 쓰러졌다는것을 아시고는 몹시 가슴아파하시며 귀중한 약재와 함께 유능한 의사들도 보내주시였고 그의 안해가 귀를 잘 듣지 못한다는것을 헤아리시여 성능높은 보청기도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창작한 소설을 보아주시고는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잘 썼다고, 박태원동무가 력사에 대하여 많이 알고있는것 같다고, 박태원동무와 같이 력사소설을 쓰는 사람이 귀하다고 크나큰 믿음의 말씀을 주시였으며 귀중한 선물도 안겨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박태원선생이 창작에 전념할수 있게 그의 안해가 전적으로 창작사업을 도와주고 시중을 들어주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으며 앞 못 보는 작가의 정신적고독감마저 깊이 헤아리시고 라지오가 달린 최신형전축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뿐이 아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68(1979)년 12월 7일 생일 70돐을 맞는 박태원선생이 국기훈장 제1급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시는 생일상을 받아안도록 하여주시였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일가친척들까지 모두 모여서 박태원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도록 해주시였으며 기록영화까지 찍게 해주시였다. 그때 찍은 장면이 기록영화 《빛나는 삶의 품》에 나온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음해인 주체69(1980)년에는 박태원선생을 《로동신문》에 소개하여 온 세상이 다 아는 사람으로 되게 하여주시였다.
절세의 위인들의 사랑과 은정은 그대로 불사약이 되여 그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완강한 의지로 창작사업을 이어갈수 있었고 10여년만에 3권으로 된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할수 있었다.
박태원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작가로 한생을 살았으며 창작활동공적으로 하여 사후에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북행길을 힘있게 다그치는 남조선의 애국적인 문화예술인들속에는 김수조선생도 있었다.
1930년대 초엽 서울시 종로구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속에서 자랐다. 굴뚝소제, 온돌수리 등 막벌이로 여러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작은 배조차 채워주지 못해 온갖 고역을 치르던 그의 아버지는 김수조선생이 9살 나던 해 끝내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예술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던 김수조선생이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하여 자기의 꿈을 실현할수 없었다.
해방은 되였어도 그에게는 기쁨이 차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남조선인민들에게 착취와 억압만을 강요하는 미제의 식민지통치와 민족분렬정책을 반대한것이 《죄》가 되여 감옥살이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러하던 그의 인생에서 극적전환이 일어난것은 조국해방전쟁시기였다.
서울이 해방되자 그는 군중을 전쟁승리와 민주개혁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리고 이 좋은 세상을 지키는 길에 자기의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할 불같은 마음을 안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였다.
공화국에서는 예술을 희망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그가 인민군대의 어느 한 협주단에서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수많은 전선위문공연들에 참가하였으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자기의 꿈을 꽃피워줄 품을 찾아 주저없이 북행길에 올랐었다.
남조선땅에서 천대와 멸시, 박해만이 차례지던 그에게 공화국이 안겨준것은 영예와 행복, 사랑이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남조선에서는 바랄수도 없었던 대학공부를 마친 그는 자기가 희망하던대로 예술창조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경축야회공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 조선로동당창건 55돐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위대한 수령님 탄생 90돐과 조선인민군창건 70돐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비롯한 여러 경축공연들의 총연출을 담당하여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절세의 위인들을 높이 모신 우리 민족의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세상에 높이 자랑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이런 성과들을 거둘수 있은것은 그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만이 아니였다.
예로부터 성공한 자식의 뒤에는 그를 키운 훌륭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전해져오고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모르고 자란 김수조선생에게 있어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은 진정 친어버이이시고 자애로운 스승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의 총연출을 담당한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창작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걱정하고있을 때 여러차례 만나주시면서 그에게 창작의 나래를 달아주시고 창조의 큰 심장을 안겨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축전행사가 끝난 후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몸소 그를 불러주시고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또한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90돐과 조선인민군창건 70돐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총연출책임을 다시금 맡겨주시고 그를 10여차례나 만나주시면서 작품의 구성형식과 방법, 그 실천적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김수조선생이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고도 건강한 몸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주체90(2001)년 어느날이였다. 이날은 년중에서도 제일 덥다고 하는 날중의 하나인 초복날이였다.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는 새로운 작품창작과 관련한 가르치심을 주시려는줄 알고 급히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옛날부터 초복에는 단고기를 먹어야 좋다고 했기에 단고기를 먹이고싶어 불렀다고 다정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순간 그는 솟구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자신께서는 대소한의 추위도, 삼복의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쪽잠과 줴기밥으로 선군령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면서도 전사들의 건강을 위해 이처럼 마음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목이 메였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언제인가도 그가 새로운 작품창작도중에 부상당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서는 차까지 보내시여 가까이 불러주시고 그의 몸상태를 알아보시며 몸소 치료대책까지 세워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연회석상에 그를 불러주시고 축배잔까지 안겨주시였으며 60돐, 70돐생일상까지 보내주시는 은정을 거듭 안겨주시였다.
그리하여 어제날 길가의 조약돌마냥 천대받던 김수조선생은 오늘 온 나라가 다 아는 《김일성상》계관인, 공화국영웅, 인민예술가로 자라날수 있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운 예술인은 비단 김수조선생만이 아니다. 인민배우 전우봉선생도 그러한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서울이 고향인 그의 배우생활은 16살 나던 해 어느 한 극단에서부터 시작되였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배우생활은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긴 때부터 시작되였다.
서울해방과 함께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보람찬 예술활동을 시작한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자기에게 참된 예술창조의 길을 활짝 열어준 공화국의 품을 찾아 북행길에 올랐다.
공화국에서는 한사람의 전투원이 귀중하였던 준엄한 전화의 나날 그를 평양음악대학(당시)에 소환하여 마음껏 음악예술을 배울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모든것이 부족하였던 전후시기에는 외국에까지 가서 공부하도록 해주었다.
그의 재능은 절세의 위인들의 손길아래 더욱 활짝 꽃피여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그의 노래를 몸소 들어주시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높은 평가를 주시였으며 그후에도 수십차례나 그의 노래를 들어주시고 목소리가 부드럽고 노래를 잘 부른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 땅에 문학예술혁명의 포성이 높이 울리던 시기 그가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와 《유격대의 오형제》를 비롯한 10여편의 영화주제가들을 훌륭히 록음형상하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리고 그를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 음악무용이야기 《락원의 노래》의 주요배역으로 내세워주시고 노래와 연기, 대사와 분장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음악예술의 천재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세심한 보살피심속에 전우봉선생은 《남산의 푸른 소나무》, 《눈이 내린다》를 비롯한 100여편의 명곡들도 독창으로 훌륭히 형상할수 있었고 수많은 국내 및 대외공연활동에 참가하여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었다. 특히 그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된 수십여차례의 공연에 참가하여 절세의 위인들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받아안는 영광을 지닐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 가사발음과 음악적표현의 정확성, 민족적정서의 능란한 구사, 감정표현의 진실성과 섬세성 등의 형상적특징으로 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독창가수로, 인민배우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런 크나큰 사랑의 품이 있어 박태원, 김수조, 전우봉선생들만이 아니라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을 찾아왔던 《김일성상》계관인인 윤복진, 《김일성상》계관인인 김세륜,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인민예술가인 리정언, 공훈예술가인 김영규, 80고령에 독창회에 출연하였던 권원한선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 예술인들이 자기의 희망대로 재능을 활짝 꽃피울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