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3)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
□ 일가족이 찾은 애국의 길
그가 누구이든 애국의 참된 삶을 산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높은 뜻을 지녔다고 하여 저절로 애국의 길을 걷게 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이 무엇이냐 하는 옳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애국의 참된 길을 찾지 못하면 주관적으로는 애국을 한다고 생각하며 동분서주할지언정 실제에 있어서는 나라와 민족을 등진 반역의 길을 걸을수도 있다.
공화국은 파란많은 인생길을 굽이굽이 에돌다가 고목이 되여 찾아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과거지사를 묻지 않고 한품에 안아 여생이나마 참되게 살도록 이끌어주고 애국지사로 다시 태여날수 있게 하여주는 은혜로운 품이다.
최덕신선생이 70고개를 바라보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공화국을 방문할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의 뇌리를 강하게 지배한것은 그곳에서 과연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겠는가 하는 위구심이였다.
최덕신(1914. 9. 17-1989. 11. 16) 애국지사
해방후 오랜 기간 남조선괴뢰군부와 《정계》의 요직에 있다가 1970년대에 해외로 망명. 주체75(1986)년 8월 공화국에 영주. 주체75(1986)년 9월부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통일신보사 명예사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주체78(1989)년 3월부터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김일성훈장》수훈자, 조국통일상수상자.
1920년대 중국 동북지방의 화전에서 화성의숙 숙장으로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반일감정을 가지게 된 그는 1936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년간 중국땅을 전전하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을 반대하여 의로운 활동을 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그는 나름대로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일념으로 남조선에서 괴뢰군창설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조국해방전쟁시기는 물론 전쟁후에도 남조선괴뢰군부와 《정계》의 요직에서 복무하였다.
그러한 과정에 그는 남조선집권자들의 매국적이며 반통일적인 처사에 환멸을 느끼게 되였고 자기가 걸어온 길이 애국이 아니라 반역의 길이였음을 늦게나마 통절히 깨닫게 되였으며 1977년초 마침내 오욕된 과거와 결별하는 결단을 내렸다. 해외에서의 정치적망명생활기간 그는 여러 해외민주운동단체의 고문, 회장 등을 력임하면서 남조선괴뢰들의 반공파쑈정책과 민족분렬영구화책동을 반대하고 광범한 해외교포들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
그 나날에 정치적방랑자로서의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깨닫게 되였으며 공화국이야말로 민족의 운명을 책임져주는 본거지이라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였고 뒤늦게나마 평양방문의사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쉽게 내릴수 없었던 중대결심이였으나 자신의 지난날의 흠을 결코 가리울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화국이 채찍이 아니라 객지에서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돌아온 자식을 뜨겁게 품어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맞아줄줄을 그가 어이 알았으랴.
공화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위대한 사랑의 빛발이 그의 걸음걸음을 따뜻이 비쳐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최덕신선생의 평양방문의사를 애국심의 발현으로 귀중히 여기시고 그가 인생말년이나마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삶을 빛내이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신것이다.
조국통일이자 민족의 대단결이다. 비록 민족앞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통일을 원하고 통일을 위한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묻지 말고 손잡고나가야 한다. 이것이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을 이룩하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이고 의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을 방문한 최덕신선생이 선친의 묘부터 찾도록 해주시였다.
최덕신선생이 평양시교외에 자리잡은 선친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였다.
양지바른 산허리에 봉분을 크게 하고 앉은 묘앞에 높이 1m도 넘는 번듯한 비석이 세워져있고 거기에 《애국지사 최동오》라는 비문이 새겨져있는것을 본 최덕신선생은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애국지사 최동오》, 몇번이고 조용히 입속으로 비문을 읽어나가는 그의 귀전에는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 흥분에 겨워하던 선친의 말이 다시금 쟁쟁히 울리는듯 하였다.
《이사람아, 왜정때 화성의숙에서 공부를 하셨던 그 김성주학생이 바로 김일성장군이였어. 보천보에 불을 질러 왜놈들을 전률케 하신 그 민족의 영웅이 김형직선생의 자제분이였거던. 이제는 우리 민족이 안길 품이 있어. 그분은 확실히 우리 민족의 구세주야!》
그의 선친 최동오선생은 천도교인이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숙장선생》이라고 정을 담아 회고하여주신 최동오선생은 33인으로 불리우는 3. 1인민봉기 주도자의 한사람인 천도교3세 교주 손병희의 제자였다.
최동오선생은 상해《림시정부》의 요직에 있다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군사정치학교인 화성의숙의 숙장으로 있던 때인 주체15(1926)년 6월 화성의숙에 입학하신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그이의 비범한 예지와 해박한 식견, 열렬한 조국애와 민족애, 넓은 도량과 소탈한 인품에 매혹되였다.
해방후 남조선정계에서 《과도립법의원》 부의장, 《민족자주련맹》 상무위원을 하던 그는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에도 참가하였다. 그후 남조선에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위해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던 그는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남조선의 많은 정계인사들과 함께 공화국으로 들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그를 몸소 만나주시고 어제날과 다름없이 따뜻이 대해주시였으며 그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민족의 자주권과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헌신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로환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몹시 애석해하시면서 장례를 잘 치르도록 뜨거운 은정을 돌려주시였으며 애국지사의 값높은 칭호와 더불어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동행하였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일군들로부터 자기 아버지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최덕신선생의 가슴속에는 선친의 생의 은인이신 그이를 뵙고 감사를 드리고싶은 생각이 가득차올랐다.
그러나 전쟁시기 자기 아버지가 깃을 편 보금자리를 향해 총포탄을 쏜 의리도 량심도 없는 죄많은 망명객에 불과한 자기를 그이께서 어찌 만나주실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솟구치는 욕망을 눌러버렸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최덕신선생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시여 현지지도의 바쁘신 길에서 몸소 그를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도교식으로 큰절을 올리려고 하는 그에게 반갑다고, 참으로 반갑다고 하시면서 뜨겁게 포옹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가 오랜 기간 선친을 따뜻이 보호해주시고 보살펴주신 다심한 사랑과 은공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자 손을 내저으시며 그것은 은공이 아니라 응당 해야 할 도리이라고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는 오늘 최선생을 만나보니 최의산(최동오선생의 별칭)선생이 생각난다고 하시며 그의 선친에 대한 감회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최의산선생은 바로 나의 선생이였으므로 최의산선생과 나와의 사이는 결국 선생과 제자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매우 깊은 정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우리는 최의산선생이 요구하는대로 다 만족시켜주면서 잘 모시느라고 하였습니다. 최의산선생이 건강하였을 때에는 휴양소에도 다니였고 금강산에도 여러번 갔다왔습니다.》
그러시고 수령님께서는 내가 보기에는 최의산선생은 통일을 하자고 애를 썼는데 통일도 되지 않고 하여 아마 여러가지 고민을 많이 한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선친앞에 불효하고 조국앞에 불충한 자기의 죄를 자책하며 얼굴을 들지 못하는 최덕신선생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신듯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용한 어조로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이고 지금 나라가 분렬이냐, 통일이냐 하는 기로에 선 이때에 우리와 손을 잡고 통일을 위하여 한몫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최선생이 지난날의 일들을 씻어버리고 조국통일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가진데 대하여 감사히 여기고있습니다.》
부드럽게 하시는 말씀이였다. 그러나 그 음성은 그의 심장을 쾅쾅 울려주었다.
불민한 과거를 탓하지 않고 통일애국의 길에 나서려는 오늘의 마음을 더 소중히 여겨주시며 한품에 안아주시는 그이께 온몸, 온넋을 다 맡기고싶은 충동이 그의 가슴속깊이에서 세차게 소용돌이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정견과 신앙이 다른 각계층 우리 민족이 하나로 단합되자면 무엇보다도 민족자주의식을 가져야 한다는데 대하여 그리고 큰 나라들이 우리 나라를 노리고있는 조건에서 우리 나라가 큰 나라들의 희생물로 되여서는 안되며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해야 한다는데 대하여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덕신선생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믿음은 곡절많던 그의 운명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고 새봄을 안겨준 재생의 빛발이였다.
그후 최덕신선생은 여러차례 공화국을 방문하는 과정에 어느 길이 진정한 애국애족의 길인가 하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는 공화국이 자주, 자립, 자위의 나라로서 조선민족의 높은 긍지와 존엄을 당당히 떨치고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묻지 않고 정견과 주의주장, 신앙에 관계없이 다 포섭하여 함께 손잡고나아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옳바른 정책과 민족대단결로선에 공감하게 되였다.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천도교인으로서 일생동안 동경하고 모색하던 지상천국을 공화국의 모습에서 찾게 된 그는 여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정의로운 일에 바칠 결심을 품고 마침내 공화국영주를 청원하였다.
이것은 지난날에는 비록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만 과거와 결별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서 새 출발을 하겠다는 사람에 대하여서는 그가 누구이든 한품에 안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이 낳은 또 하나의 사랑의 전설이였다.
만나주실 때마다 새힘과 용기를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에 영주하겠다는 최덕신선생의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시면서 조국에 영주하면 최덕신선생이 골프장이나 관리하겠다고 한다는데 선생이야 해외에 있을 때에도 조국통일에 많은 관심을 가졌댔으니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중요한 책임을 담당하는것이 어떤가고, 그렇게 해주겠다면 더없이 기쁘겠다고 유정하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최덕신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를 선생이 아니라 동무라고 불러주시였으면 하는 소망까지도 서슴없이 말씀드리였으며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너그러이 받아주시여 《최덕신동무!》라고 흔쾌히 불러주시였다.
《최덕신동무!》
참으로 이 부름은 어제날의 민족주의자 최덕신이 오늘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동지로 새롭게 태여났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뜻깊은 선언이였다.
공화국에 영주한 최덕신선생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통일신보사 명예사장의 중임과 함께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의 책임적인 직책에서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으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에 헌신하였다.
공화국에서는 영주한 그들부부에게 훌륭한 살림집을 마련해주고 아무런 불편없이 생활하도록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내외를 불러주시여 오찬도 같이하시면서 건강과 독서, 문화정서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그리고 최덕신선생이 중병으로 림종을 앞두었을 때에는 병상에 있는 그를 찾아주시고 민족의 륭성번영과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겠다고 하던 동무였는데 어떻게 되여 이런 중병을 앓게 되였는가고 하시면서 침상곁을 떠나지 못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끝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더없이 애석해하시면서 그의 장례식을 국가장의로 하도록 하시였으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고인의 령구를 찾으시여 유가족들에게 《최덕신위원장이 내 사랑을 다 받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가 10년간은 나의 사랑을 더 받아야 하였습니다. 아까운 사람이 그렇게 되였습니다.》라고 하시며 가슴아파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유가족들이 최덕신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잘해야 한다고, 우리는 조국통일을 하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드시여 최덕신선생을 각별한 정으로 보살피시였다. 그이께서는 최덕신선생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외국에까지 보내여 병치료를 받도록 해주시고 많은 고급약재와 보약들을 보내주시였으며 특별비행기로 두부와 콩나물, 남새 등 조선음식감들을 보내주기까지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을 원형으로 하는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최현덕편)을 세상에 내놓도록 하시여 그의 삶이 민족과 더불어 빛나도록 해주시였다.
주체83(1994)년 9월 어느날이였다.
최덕신선생의 미망인인 류미영녀사를 전화로 찾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휴양을 가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지난해에 류미영위원장에게 삼지연에 같이 가서 휴양하자고 하시였는데 수령님의 유훈대로 휴양을 떠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때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님을 뜻밖에 잃은 슬픔으로 하여 온 나라가 피눈물의 바다에 잠겨있던 때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누구보다도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계시였지만 수령님께서 최덕신선생에게 못다 주신 사랑까지 합쳐 미망인인 그에게 은정을 더해주시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오늘 류미영녀사는 고령이지만 왕성한 정력에 넘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남편이 다하지 못한 몫까지 합쳐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고있다.
참된 애국의 길을 찾지 못했던것으로 하여 남조선과 해외에서 방황하던 최덕신선생이 공화국에 삶의 닻을 내리고 살아온 기간은 불과 3년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최덕신선생은 진정한 조국의 품, 절세의 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의 품에 안겼기에 《김일성훈장》수훈자, 조국통일상수상자, 애국지사로 값높은 삶의 흔적을 남길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최동오선생, 장인 류동열선생, 처이모 류영준선생들과 나란히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 저마끔 애국을 한다며 각이한 인생행로를 걸어온 일가족이 영생의 높은 언덕에 함께 오를수 있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