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3)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
□ 민족의 장래는 북에 있다
민족분렬의 년륜이 한돌기 또 한돌기 새겨질수록 통일에 대한 겨레의 지향은 더더욱 강렬해졌다. 남조선인민들속에서는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기운과 함께 공화국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높아갔다.
미제와 그 하수인들은 남조선인민들속에서 높아가는 이러한 련북기운을 막아보려 군사적폭압에 더욱 매여달리는 한편 군사분계선에 콩크리트장벽까지 쌓아 북과 남을 영구히 격페시키려 책동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공화국으로 쏠리는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장벽을 쌓을수는 없었다.
오히려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평양행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만 났다. 미제가 쥐여준 총을 집어던지고 삼엄한 군사분계선을 배밀이로 넘어온 괴뢰군병사가 있는가 하면 비행기의 기수를 북으로 돌려 하늘길로 북행한 괴뢰군군속들도 있었으며 해외로 나가 여러 경로를 거쳐 공화국에 들어온 정계인물들도 있었다.
그들이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 구체적인 리유는 각이하였지만 통털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북에 민족의 살길이 있고 자기들 개인의 살길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운명적인 선택이였다.
이 운명의 선택자들중에는 오래동안 남조선의 정계, 종교계에서 활약해온 오익제선생도 있다.
어려서부터 반일감정이 높았던 그는 해방전에 몇몇 학우들과 함께 마을에서 《소년저축회》라는 반일학생조직을 뭇고 활동하던중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되였다. 해방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평안남도 어느 한 군의 종리원 교화부장으로 있던 그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로 조국이 어려움을 겪던 1950년 가을 본의아니게 남반부로 나가게 되였다.
그후 남조선의 천도교계에 몸을 담게 된 그는 천도교 중앙총부전서(교령비서) 겸 천도교기관지 《신인간》의 주간, 천도교 중앙총부 종무원장을 거쳐 1989년부터 여러해동안 남조선천도교의 최고위직인 교령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하면서 《5공》, 《6공》시기에는 《대통령》자문기관인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에도 참가하였고 그후에는 《국민의 정부》를 낳은 《국민회의》의 창당발기인중의 한사람으로, 이 당의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그가 남조선에서 생활한 근 50년간은 자기의 어설픈 조국관에 의한 정신적방황을 체험한 기간인 동시에 옳바른 조국관을 터득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남조선에서 일신의 안위가 보장된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생활에 육체를 푹 잠글수록 그는 정신적으로는 노상 허탈감에 빠져 마음은 허전하였다.
그것은 남조선은 민족의 장래가 보이지 않는 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남조선의 력대 당국자들은 자주를 열망하는 인민대중의 투쟁을 무참히 탄압하고 억압함으로써 남조선이 내 겨레가 사는 땅이라는것을 스스로 부정하였다. 또한 민족의 정통성을 말살함으로써 남조선이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스민 강토의 한지맥이라는것을 거부하였으며 외래문화와 정신이 판을 치게 함으로써 이 땅이 반만년의 유구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겨레의 귀중한 유산이라는것을 스스로 부정하였다.
더우기 남조선의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당국의 반통일적행위에 항의하여 분신자결하고 1989년에는 공화국을 방문하였던 문익환목사가 그리고 1995년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서거 1돐 추모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공화국을 방문하였던 문익환목사의 부인이 철창속으로 끌려가는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남조선당국자들의 반통일적, 반민족적인 행위의 진면모를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인민대중의 뜻은 곧 자주의 뜻이고 애국의 뜻이다. 인민대중을 등진 상태에서는 애국도 자주도 공허한 울림으로만 남게 될것이며 그런 곳에는 민족의 장래가 있을수 없다. 오직 인민대중을 위한 애국애족의 정치를 펴나가는 사회에서만 자주도 애국도 실현될수 있다.
이런 생각이 굳어질수록 그는 자주가 철저히 확립되고 애국이 살아숨쉬는 공화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우기 남들 같으면 열백번도 더 쓰러졌을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헤쳐나가야 하는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도 천만군민이 령도자의 두리에 굳게 뭉쳐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만방에 높이 떨쳐나가는 공화국의 현실에서 오익제선생은 민족의 밝은 전도를 내다보게 되였으며 비록 늦게나마 공화국의 품에 안길 결심을 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가장 어려운 시기 조국을 배반하고 떠나갔던 자신을 과연 공화국이 받아줄것인가 하는 위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옳바른 조국관의 정립은 곧 정의와 진리의 빛이기도 하여 그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마침내 1997년 8월 그는 북행길을 단행하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공화국을 찾아온 경위에 대하여 국내외기자들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민족의 장래는 북에 있다고 확신한다.
본인이 월북을 결행하게 된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에 바탕한것이라 하겠다.
진리도 힘이 있어야 실현된다. 그 힘은 바로 령도자의 령도력이다. 이남에는 진리, 애국과 정의가 없을뿐아니라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실현할수 있는, 국민을 이끌수 있는 정치적령도자가 없다.…
그러나 이북에는 걸출한 령수가 계신다.…
민족의 장래도 김정일령도자님께 있으며 민족의 통일도 김정일령도자님께 있다.
저는 민족의 령수이신 김정일령도자님을 숭앙하여 이북에 왔음을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당당히 선언하는바이다.》
민족적량심을 잃지 않고 애국애족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한품에 따뜻이 안아 조국과 민족을 위한 보람찬 길에 내세워주는 어머니의 품이 바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의 품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이 제국주의자들의 고립압살책동으로 하여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는 때에 어머니품을 찾듯이 스스럼없이 평양에 온 그의 소행을 더욱 귀중히 여기시며 그가 소원대로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 자기의 정열을 다 바칠수 있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익제선생이 수십년전에 헤여졌던 가족들과 한지붕아래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훌륭한 집도 마련해주시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그쯘히 갖추어주시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맞이한 생일날에도 그리고 생일 70돐, 80돐을 맞을 때에도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해마다 이름난 명승지와 여러곳을 참관하도록 하시여 그가 인민이 주인된 사회주의조국의 현실과 불패의 힘의 원천에 대하여 더 잘 알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오익제선생은 공화국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더우기는 여러 종교관련시설들을 돌아보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광폭정치가 펼쳐지는 공화국에서 신앙생활의 자유가 보장되고있음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할수 있었다. 공화국에서는 교인들이 박해당하는것이 아니라 신앙생활과 조건을 보장해주고있었으며 모든 종교단체들과 교인들의 활동이 법적으로 철저히 보호되고있었다. 또한 조국이 있어야 자신과 후대들의 행복도, 신앙생활의 자유도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모든 종교인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정치를 높이 받들고 그를 적극 지지하고있었으며 애국애족의 길에서 헌신하는 종교인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있었다.
오익제선생은 이렇듯 사랑과 믿음으로 민족의 창창한 앞날을 열어나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품에 안겼기에 애국렬사의 후손으로 다시 태여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찌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직지도하신 조선국민회의 소관하에 군자금모금에 헌신한 력사적사실을 밝혀주시였다. 그리하여 주체93(2004)년 2월 오익제선생에게 아버지의 반일애국렬사증이 수여되였다.
이렇게 오익제선생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서 애국렬사의 후손으로 다시 태여날수 있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애국렬사로 다시 태여날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날로 더해만지는 이러한 각별한 사랑과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그가 삼가 편지를 올렸을 때에는 그것을 몸소 보아주시고 《감사합니다. 1998. 2. 11 김정일.》이라는 친필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통일애국의 길에 헌신하고 그 길에서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으며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고있다. 또한 그동안 자기의 생활과 체험을 통하여 절감한 사실자료들을 가지고 《현세의 한울님》, 《위인과 나의 운명》을 비롯한 여러권의 책들을 써내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상을 격조높이 칭송하였다.
민족의 미래가 북에 있다는 확신을 안고 공화국의 품에 안긴 사람들중에는 정규진선생도 있다.
정규진선생이 북행길을 결심한것은 단순히 생활적인 동기에서가 아니였다. 남조선에서 10년나마 중학교 교장으로도 있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어느 한 기업체의 리사로도 있었던 그가 1980년대말 북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된것은 인간으로서, 분렬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통일애국의 길에서 삶을 참답게 빛내여야 하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에서였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심은 그가 북행길에 오르도록 떠밀어준 정신적인 바탕으로 되였다.
경기도 포천군에는 《산정호수》라는 큰 저수지가 있다. 이 호수가기슭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곳으로 전해져오는 한채의 집이 있다.
남조선인민들속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직후 평범한 조선기와집인 이곳에 오시여 지척에 바라보이는 남쪽땅을 굽어보시다가 남녘동포들의 정상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여러날동안 식음을 전페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있다. 이런 불멸의 이야기가 깃든 곳이여서인지 이곳을 찾는 남녘인민들의 발걸음은 사시절 끊기지 않는다고 한다.
정규진선생도 여러번 이곳을 찾는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은 현대조선이 낳은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시며 그이의 정치아래 공화국은 인간평등사회, 인간중시사회로 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들의 고향에 대한 가슴뜨거운 추억담을 통해 민족의 영웅, 위대한 령도자에 대한 경모심과 공화국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게 되였다.
절세의 위인에 대한 경모심이 깊어질수록 그는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된 북반부의 현실을 직접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보고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이와 함께 반미통일지향에 불타는 애국청년학생들에 대한 고문학살사건들과 문익환목사일행과 림수경학생일행에 대한 재판처형 등 남조선괴뢰도당의 가혹한 처사들은 그로 하여금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 자신의 삶을 다 바치기 위해서도 북행길을 다그쳐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이런 생각들을 안고 공화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자신의 결심이 천백번 옳았다는것을 절감하였다.
공화국은 민족의 얼이 살아숨쉬고 우리의것이 찬란히 개화발전하는 민족자주의 락원이였다.
그가 공화국에 와서 제일먼저 발견하고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것은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구호였다.
그는 공화국이 높은 권위를 지닌 존엄있는 나라로 칭송받고있는 리유를 이 구호의 깊은 뜻에서 리해할수 있었고 우리 민족의 미래는 밝으며 멀지 않아 조국이 통일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더우기 그는 수령은 인민을 믿고 인민은 수령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공화국의 일심단결된 모습은 돈으로도 얻을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가장 귀중한것이며 그 힘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고 모두가 자기자신의 운명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하나로 련결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회, 무료교육, 무상치료, 세금없는 공화국의 사회제도는 참으로 좋은 제도이며 이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이야말로 인류의 리상사회라는 확신을 가지였다.
하기에 그는 국내외기자들과 회견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북사회제도는 좋은 제도이다.
이북은 흥하는 사회이고 이남은 망하는 제도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주의는 반드시 승리하며 자본주의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단정할수 있다.
민족의 미래는 이북의 주체적사회주의에 있다고 나는 확신성있게 말하고싶다.》